우선, 주도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변화하는 세상에 대처 방안을 제시해야 할 교회 리더그룹이 대체로 연로하다. 즉, 새로운 공유경제 플랫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교회에서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역시 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분이 많다). 최근에 교회에서 교회의 미래를 구상하고자 마련한 “비전 추진단”의 회의에 참석했는데, 비전 추진단 회의 수준은 여전히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2019년부터 참석해서 여러 의견을 개진했으나 결론은 교회 증축만 가시적으로 보일 뿐이다.
다음은 꽤 모순적인데, 자본주의에 철저히 부응하고 그 방식을 철저히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돈’과 관련한 영리사업을 실행하는 데 부담을 갖는다. 비자금은 조성할망정, 합법적인 방법으로 혁신적인 사업 하는 건 꺼린다. “거룩한 교회가 어찌 영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인데, 평생 교회에 다닌 필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교회는 독선으로 가득하다. 누구나 ‘선’하다. 오직 선한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스스로 ‘선민의식’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선한 본인의 주장이나 행동이 비판 대상이 됐을 때 그는 교회를 떠나거나, 혹은 그런 비판의 도마에 놓이는 걸 힘들어 해서 스스로 주장을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즉, 교회는 토론이 힘들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토론이 필요한데 성도들은 피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좋은 건 발전이 아니라, 기존 관행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발전을 저해한다.
사회는 계속 변한다.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진보’에는 ‘빈곤’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헨리 조지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 경제 성장에 산업혁명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성장이 인류를 행복하게 했는가? 라는 질문에 과감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장을 낳았을 때 ‘성장’은 혼자가 아니었다. 우선, 상대적인 빈곤이 함께 태어났다(절대적인 빈곤은 서서히 줄고 있다). 상대적이라는 의미가 절대적이라는 의미에 묻힐 수 있는데, 인간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서 그 심신의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저항?
필자는 산업혁명에 반작용과 저항을 『4차 산업혁명과 자치분권 시대』에 이미 설명했다. 1차 산업혁명 후 러다이트들의 기계 파괴 운동이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2차 산업혁명은 대량 생산체제를 수립했고, 성장의 가도를 잘 달렸지만,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피해갈 수 없었다. 3차 산업혁명은 파편화된 개인주의와 정치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양산하는 동시에‘아랍의 봄’, ‘Occupy wall street!’과 같은 저항 세력을 낳았고, 포퓰리즘이 새로운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게 했다.
즉, 각 산업혁명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그 반대급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불평등이 만연해졌고, 상대적 박탈감이 발생하고 인간의 삶의 영역에 크게 작용하기 시작했으며, 크고 작은 저항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분명, 반작용이 있을 것이며 그 작용은 과거보다 세밀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과거를 미래의 거울삼아 대비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이 교훈은 항상 망각한다. 분명, 새로운 혁명 시대에도 다양한 반작용의 등장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국가는 없는 듯하다. 이 역시 역사적 교훈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가진 자는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더라도 꽤 오랜 시간 버틴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친일파의 자손들이 버젓이 잘살고 있으며, 그들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제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 저항과 반작용의 궁극적인 원인은 불안감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은 그가 가진 답답함과 불안감을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모여서 해소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괜히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을 만든 게 아니다. 잃을 것이 없는 개인은 스스로 생명을 끊지 않는다면, 저항의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뭣인들 못 하겠는가?
독일의 사회 심리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의 『불안 사회』는 독일 사회를 살펴보면서, 불안이 주는 폐해를 보여주고 있다. 불안의 원인으로 그는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미래와 빠른 속도로 변화는 사회를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서 ‘제노포비아’, ‘극단적인 개인주의’, ‘광신자’ 등의 현상이 발생해서 사회 통합이 어렵다고 말한다. 해결 방법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불안을 해결할 방법은 ‘공동체’밖에는 없다. 사회적 소외계층일수록 더 불안해지고, 그들의 분노가 불안으로 그리고 저항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유사 기독교(이단)가 성장하고 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폐해로 바로 ‘광신자’가 늘어나는 현상을 우리 사회도 겪고 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점점 교회 내에서 소외감, 혹은 고독감을 느낄수록 성도는 떠날 것이다.
동시에 사회와 점점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교회에 출석하려는 교인도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너무 다른 교회에서 본인이 주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지침이 되는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현재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의 삶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의 효용성을 따지면, 불쾌한 기분을 느낄 성도들이 많겠지만 믿어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복음의 절대 효용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파스칼 조차도 믿음에 대한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효용성이 사라졌다고 할 때 교회에 다니는 큰 이유가 소멸된 것이나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는가? 그 상실감은 교회에 출석하는 걸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본인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이익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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