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대부분 교회는 대세에 잘 참여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로마 시대부터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약자 편에 서 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 일부만 기독교 정신을 지켰을 뿐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도 정치와 결탁한 흔적이 꽤 있으며, 그 혜택으로 기독교가 조선에 유입돼 전파될 수 있었다(그 예로 광혜원 설립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부분 교회가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군부독재 시대에도 대규모 구국 기도회를 열어서 독재자들을 후원했다(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를 보면, 당시 방위들이 구국 기도회에 참여하면 출석으로 인정해줬다는 기록이 있다) 그 대가로 교회는 성장했다. 비교적 부정적인 내용이지만, 기독교 불모지에 정착하고 뿌리내리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니얼 퍼거슨은 미국은 정교분리가 원칙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유럽과 비교했을 때 그런 수준이지, 현재까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히려 이를 부인한다면, 어떤 증거를 댈 수 있을까?)
알렌은 민영환을 우연히 치료해서 기독교를 전할 수 있었고, 양반들의 지지를 얻었다. 신사참배는 분명 우상숭배의 형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일제의 박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수도 있다(부정적으로 보면, 그저 권력에 결탁한 자기 긍정이었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지지도 기독교 자체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기에 당시, 반공 사상을 핵심 기치로 건 정권을 지지한 건 당연지사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갈등, 특히 국내의 갈등은 1920년대부터 계속됐던 부분이다.)
물론, 어쩔 수 없다고 과오를 그대로 수용하자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릇된 행동은 회개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도덕성 회복이 힘든 것이다.(물론,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기독교 집회에서 회개하는 장면이 목격 되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 기도한다고 해서 끝일까? 변화가 없으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생존과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응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제, 그 적응력을 다시 발휘해 보자. 정보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서 허우적댔던 모습을 던져 버리고 온전하게 적응해 보자. 어차피 공유경제라는 바닷속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교회도 파도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이왕에 참여할 바에는 수동적으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현재 공유경제와 관련한 사업을 추진한다면 다양한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확보된 콘텐츠와 회원, 플랫폼, 수많은 기존 성도의 신뢰는 다른 사회적 플랫폼이 단기간에 달성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 세계 기독교 인구가 21억 명을 넘는다고 한다. 규모만 볼 때 어떤 국가도(중국을 포함해도), 어떤 SNS 플랫폼도(페이스북 조차도) 기독교 규모를 넘어설 수 없다. 아울러 중국이나 페이스북보다 교회가 탁월한 부분이 있는데,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로 민주주의적이지 않기에 개인의 능력 발휘와 동기부여가 크지 않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비교했을 때도 페이스북은 온라인 회원을 의미하지만, 교회는 오프라인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성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신뢰도 부분에 있어서 훨씬 크다.
이미 주어진 조건이 좋은 데 이를 활용하지 않고, 가만히 묻어두는 건 신약에 나오는 어리석은 종 -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가져온 종과 다를 바 없다. 이미 교회 운영은 기업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회계 부분에 있어서 부정축재, 비리 등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영리사업을 투명하게 하는 게 교회 이미지를 개선하는 방법이며, 공기관의 역할을 감당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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