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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14)] 1920년 독립군의 화려한 활약-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8.07 12:59 | 최종 수정 2019.08.07 13:05 의견 0
홍범도 장군 사진(좌)과 충남 홍성에 있는 김좌진 장군 동상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픽사베이)


이번 회에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 벌어졌던 독립군 활동과 함께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납니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을 포함해 1만명 규모의 의병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겠다며 귀향해버리자 구심점을 잃은 13도 창의군은 흩어져 버립니다. 

특히 1919년 임시정부가 꾸려지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간도와 연해주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해집니다.  의병의 일부는 이곳으로 옮겨와 자연스럽게 독립군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독립군의 전투활동도 구체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이미 신민회가 결성되던 때부터 독립운동 세력은 소련이나 중국이 일본과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두하며 독립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군사 전략이나 무기는 약세였지만 언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왔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에는 이미 10년간 양성한 독립군 부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연해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이전부터 양성해왔던 독립군을 중심으로 중국의 부대와 결합해 함께 싸우겠다는 심산이었지요.

당시 소련은 국가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중국은 군벌 세력이 각지를 장악하긴 했지만 일본에 대항하는 구심점이 되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두 나라 모두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 때 이겨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군을 앞세워 이들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실리적인 이득을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결국 1920년에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독립군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독립군의 승리는 오랜 훈련을 바탕으로 한 전술과 신형 무기 덕분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사용되던 우수한 체코제 소총을 입수할 수 있어 화력을 증강시킨 상태였습니다. 강한 독립운동의 의지로 한 곳에서 기습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유리한 지형으로 적군을 유인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독립군이 옛날 의병처럼 불을 붙이는 화승총으로 싸움을 걸어올 거라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정신력만을 바탕으로 했거나 우연히 얻은 승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3V5VGzgm8

홍범도 장군은 평민 출신으로 원래 수렵일을 하는 포수였으며 생계를 위해 광산 노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생계의 도구였던 총을 일제가 빼앗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1907년 군대 해산에 이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해 사냥을 일로 하던 포수들의 총까지 압수해 조선을 완전히 무장해제하려 했습니다. 일본군이 총포의 회수를 위해 함경도 삼수와 갑산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홍범도는 자신의 고향 갑산과 인근 삼수의 포수들을 모았고, 유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게 됩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노력했고 3.1운동 이후 국내로 잠입해 일본군을 습격하며 전과를 올렸고, 독립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러 나선 일본군을 대상으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올립니다. 

한편 또다른 독립군의 주역 김좌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업적을 이룬 장군이자 김두한의 부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봉오동 전투가 끝나고 4개월이 지난 시점에 벌어진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만이 아니라 홍범도 장군, 기타 독립군들이 연합한 작전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을 위한 작전을 위해 간도에 들어옵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매복·기습작전과 우회작전을 펼치며 각각의 전투마다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섬멸하며 독립전쟁 사상 가장 큰 전과를 올려 청산리 대첩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임시정부를 수립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고,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었기에 독립을 위한 큰 힘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투쟁의 동력이 되었고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계속되는 전쟁 지속능력이 부족해 전투를 마친 독립군은 러시아 지역으로 철수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수많은 만주의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합니다. 만주의 참변이 일어나며 독립운동과 무장투쟁도 위축됩니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 대해 승전보를 알리던 독립군 장군이라는 화려한 이력과는 달리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1921년 자유시사변이라 불리는 소련의 무장해제령에 의해 독립군의 무기를 빼앗겼고, 연해주 이르크츠크로 옮겨가 한인들과 집단농장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러나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또다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고 노동자로 삶을 연명하다 해방이 오기 전인 1943년 세상을 떠납니다.

한편 러시아로 넘어간 독립운동 세력들은 사회주의파와 상해파로 나뉘면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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