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가 전해졌다(물론 기독교를 접한 거 훨씬 더 오래전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스타일의 교회가 세워진 건 아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가 국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과 작용해서 정착한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교회의 복음이 보편적인 성격을 띄고 있을지는 몰라도 정착할 때는 국가나 사회의 특수한 상황과 어느 정도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선교사들은 밑에서부터 포교활동을 했다기 보다는 위에서부터 시작한 걸로 볼 때 한국 기독교는 그 메시지는 서민적이나 설립 과정은 전혀 서민적이지 않았다.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로마 시대에도 교회는 당시 권력과 교류하면서 제국을 유지 시킬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아래로부터 시작한 종교가 아니라, 위에서 시작한 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개신교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난 퓨리턴들의 바람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볼 때 그들의 위치도 상층부였다.

그나마 일본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던 교회의 방어벽이 있었기에 꽤 많은 민중이 교회를 찾았고, 그런 가운데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 기독교의 기틀을 제공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동휘처럼 전도사의 삶을 살다가 공산주의로 전향한 사례를(박헌영도 승동교회를 다녔던 사실이 있다) 볼 때 당시 민족 기독교 정신의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기독교가 도입될 당시에는 서민층부터 받아들인 걸로 시각을 돌려 보는 것이다. 실제로 기존의 권력층이 유지하는 사상이었던 유교와 기독교는 큰 마찰을 빚었고, 아직도 그 마찰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권력은 물리적 힘이 강한 쪽으로 이동한다. 서양의 침공, 조일통상조규 등 외세의 공세 앞에 권력의 기반이었던 유교가 무너지고 그 공백을 다양한 사상이 채우게 되는데(대종교, 동학, 천주교, 개신교 등) 당연히 서구의 힘을 앞세운 기독교가 새로운 권력의 주체로 성장한다.

만약 당시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면, 새로운 양태의 기독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일제 치하에 놓여 있었던 교회는 그 본성상 권력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교회는 제1계명을 어기는 신사참배를 받아 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로의 전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타협하고, 체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유지할 수 있도록 조력했던 한국 교회는 근대화 시절 독재 정권과도 유사하게 타협했고, 덕분에 교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정권의 반공 기치를 후원할 수 있는 강력한 지지기반이었고, 초기 통역정치를 할 때도 기독교인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대표적인 사람이 배민수 목사이다).

교회는 일사불란한 조직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고, 성도들을 관리했다. 대부분 교회는 작은 단위의 모임을 조성하고, 그 작은 모임들이 모여서 더 큰 단위의 모임으로 커지게 된다. 작은 단위의 모임은 주로 가정주부가 대부분인데, 1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장’들을 교역자들이 관리한다. 필자가 학창 시절에 경험한 것 중 기억나는 것은 교역자가 가정에 신방 할 때는 대접하는 음식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동네 제과점에서 구매해서 내놓는 곰보빵(소보로)에서 여름철에는 삼계탕 수준으로 격상했다. 대체로 가장 어린 사람이 교역자지만, 위치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대우는 어린 시절에 봤을 때도 대단하고 부러웠다. 

교회의 조직관리는 철저했고, 당연히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세련됐고, 문맹이었던 사람들도 성경을 보고, 찬송가를 따라 부르면서 글을 깨치는 일도 있었다. 교회 건물은 일반 성도가 사는 집에 비해 깨끗하고 화려했으며(예를 들어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실제로 교회에 다니면서 부자가 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였겠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을 생각할 때는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