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살에 만난 우리 딸 : 아빠 육아의 시작
주말부부 시절이 끝났습니다. 햇수로 3년, 순수 기간으로 2년 6개월 정도 됩니다. 오가면서 쓴 KTX 비용과 도시락 값만 생각해도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오갔지만, 결과적으로 돌아온 건 아내의 불만과 낯설어하는 안아, 그리고 나날이 지쳐가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여보, 안아 돌봐주시는 이모님이 다리를 다치셨대. 그래서 안아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
어느 날 아내한테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지?”
“일단, 내려와서 상의하자.”
“응. 알았어! 최대한 일찍 내려갈게.”
당시 이래저래 추진했던 일들도 잘되지 않았고, 대학원도 휴학하게 된 상황이어서 안아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야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현재 일은 잘되지 않았어도 다음 기회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선뜻 “내가 안아 볼게!”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도 이런 제 상황을 알았기에 무리하게 요청하지 않고, 여러 대안을 모색하자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내는 참 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내려가서 저녁이 돼서야 아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안아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죠.
“일단, 몇 가지 방법이 있어. 먼저, 내가 한 달 정도 이모님 대신 안아를 돌보는 방법, 그리고 안아를 우리 본가에 데려가서 할머니께 잠시 부탁드리는 방법이 있어.”
“그렇게 되면, 내가 매주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가야겠지?”
“그렇게 해야겠지.”
당시에는 제가 대구에 와서 안아를 전적으로 돌본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도 당분간 시어머니께 맡긴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여보의 체력을 고려하고, 안아가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 안아를 본가에 맡기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아. 안아랑 여보가 떨어져 산다고 생각하면, 안아가 너무 불쌍해.”
이 말을 하는 동안 제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할머니와 아빠가 엄마의 공백을 메워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오가는 힘겨운 과정을 일과 동시에 하게 된다는 상황을 상상해 보니,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한 달 정도만 안아를 돌보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아내와 안아가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기간이 길지 않으니까, 내가 안아를 볼게. 그래 봤자 한 달 정도잖아.”
뜻밖의 해답에 아내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습니다. 그만큼 아내와 안아의 관계는 소중했습니다.
“응. 고마워!”
“뭘. 아빠가 딸을 돌보는 게 고마울 일인가?”
12월 어느 날 그렇게 안아와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진짜 가족처럼 살 수 있었죠. 일주일에 한 번 보던 딸을 매일 보게 되니, 처음에는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돌보더라도 장모님께서 저녁 시간에는 도와주셔서 어려울 일도 없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이런 행복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안아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옆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며, 좋아했습니다. 물론, 아빠는 더 좋았습니다. 이제 낯설지 않은 부녀지간이 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참 성공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곧 사라졌습니다.
아침 이후 시간에 모두 나가고 둘만의 시간이 되니, 쉽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안아는 영상 보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빠한테 안기거나 함께 노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아빠를 사랑하는 딸, 그야말로 아빠 입장에서 최고인데, 돌봄이라는 역할을 대충 하려는 아빠한테는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원래 저는 외향적이어서 집 안에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힘들어합니다. 혹, 집에 있더라도 뭔가를 계속 읽고 정리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아가 함께 있으니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말도 할 줄 알고, 의사 표현도 잘하는 안 아였지만,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고, 밥도 먹여줘야 했습니다.
육아의 기본 중에서 기본이었지만 그 기본조차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응가는 여전히 갈아주기 힘들었고, 밥을 먹일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먹이다가 지쳐서 결국에는 “빨리 먹어!”라고 재촉하기 일쑤였죠.
지금 생각하면 요령이 너무 없었습니다. 즉,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배워야 하고, 찾아봐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면서 루소의 <에밀>을 읽고, 존 듀이의 다양한 교육 서적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거시적으로 생각한 거 같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세밀한 육아요령과 스킬이었는데도 저는 그런 내용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철학자의 담론과 이론들만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 내 예쁜 눈에서 눈물이!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됐습니다. 돌이 지난 아이를 돌보는 거여서 처음에는 ‘어려울 게 뭐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다만, 제가 활동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아이하고 집 안에 주로 있어야 한다는 게 걸렸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서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우리 안아 잘 잤어?”
“응. 아빠도 있네.”
안아는 아빠가 있는 게 너무 좋았나 봅니다. 저도 몇 년 만에 아내와 딸과 지내니 좋았습니다. 정말 남편이 된 기분이었고, 예쁜 딸의 아빠라는 뿌듯함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똑같은 패턴에 지루해졌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은 오직 몇 분이었고, 다음부터는 안아와의 전투를 시작됐죠.
“안아야, 아빠가 잠시 뭘 해야 하니까, 뽀로로 좀 보고 있어.”
“응. 그럴게.”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안아가 아빠를 찾습니다. 아이들한테 뽀통령이라고 불리는 뽀로로지만, 안아한테는 큰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빠한테 매달려서 놀아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은 하도 매달려 있어서 화장실도 못 가게 했습니다. 혹, 강제로 떼어놓고 화장실에 가면, 여지없이 안아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하니.’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아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걱정이 돼 전화한 것이었죠. 그러지 않아도 초보 아빠한테 육아를 맡기고 직장에 나갔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저는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습니다.
“응. 왜?”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지금 안아가 매달려서 나 화장실도 못 가게 해!”
“에고. 힘들겠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한테 메시지가 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앞섰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상기시켜 줍니다.
‘여보가 그랬잖아. 다른 아빠는 자녀들과 함께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나는 아이와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특권이 부여돼서 고맙다고.’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한 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고마움은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은 가까운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무지의 동물입니다. 그러니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꼭 겪어봐야만 압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일 리가 있을까요?
예상보다 힘들고, 지루하고, 답답했어도 안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당장은 힘들어도 나중에는 정말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미래고 현재는 현재였습니다. 당장 아이는 아빠한테 매달려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화장실도 못 가게 하는 판국에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원래 가만히 있지 못해서 뭐라도 하고 있어야 안정이 되는 성격입니다. 쉬는 날보다 일하는 날을 더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죠.
물론, 육아가 아주 힘든 일이라는 걸 지금은 알지만, 당시에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아이와 함께 있는 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고,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보내는 거보다는 생산적인 일을 하자.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자.’
특별한 활동이 없다 보니, 잠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체력이 남아돈 거죠. 그 체력으로 안아를 더 잘 돌봐줬어야 했는데, 당시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아이를 돌보고 나머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생각인데 “모르면 용감하다”라는 말처럼 두 가지를 병행했습니다.
우선순위는 분명 육아인데, 어찌하다 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주가 되고, 육아가 객이 된 ‘주객전도(主客顚倒)’상황이 됐습니다.
하루는 평소처럼 안아한테 영상을 틀어주고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영상이 재미없었는지, 아니면 아빠랑 놀고 싶었는지 귀찮게 했습니다.
“아빠, 조금만 책 읽으면 되니까, 안아 혼자 뿡뿡이나 뽀로로 보고 있으면 안 될까?”
“응. 알았어!”
대답은 했지만, 채 5분이 안 돼서 똑같은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되풀이하다가 제 방문을 잠갔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아가 아빠를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영상을 볼 거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잠시 후, 어김없이 안아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지요. 문이 열리지 않자, “아빠! 아빠!”를 찾습니다.
“응. 아빠 방 안에 있어 조금 있다가 나갈 테니까 보고 싶은 거 보고 있어.”
“문 좀 열어줘!”
“잠시만 혼자 있으라니까!”
이제 남은 건 안아의 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육아 경험이 있는 부모는 알 거예요. 마지막은 아이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엉엉!!”
우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텨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아의 말에 저는 문을 열고 말았습니다.
“내 예쁜 눈에 눈물이!”
정확하게 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운 제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훈육하면서 자주 보는 눈물이지만, 당시에는 웃음만 짓게 해 주고 그 웃음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곧 문을 열고 나가서 안아를 안아주었습니다.
“아빠가 미안해! 우리 예쁜 안아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다니. 정말 미안해!”
육아하면서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날이었습니다. 잠시 안아를 달래주고, 같이 놀았습니다. 낮잠이 없는 안 아였지만, 아빠랑 하루 내내 있는 날에는 잠시 낮잠을 주는 배려를 베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2월 한 달이 지났습니다. 초보 아빠에게는 답답하고 지루하고, 그런 아빠의 딸은 어쩔 수 없이 낮잠을 자는 배려를 베풀어야 하는 순수한 동거 기간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과 동시에 종료됐습니다.
◇ 좋은 아빠 TIP
1. 육아할 때는 아이에게만 집중하자.
육아를 다른 일과 병행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둬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해 주면, 일정 시간 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물론,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아이가 생각하는 일정 시간과 아빠가 생각하는 일정 시간이 다른 게 문제입니다.
아빠는 30분을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이는 10분도 채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보호자가 아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면 찾아야 합니다. 용변이 마려울 수도 있고, 배가 고플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혼자 있기 싫어서 보호자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과 무관하게 보호자는 아이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아를 하는 사람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2. 기본적인 육아서 정도는 읽자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에서 저는 교육과 관련한 저서를 꽤 읽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가 성장하고 대화가 통할 때쯤에는 그런 저서의 내용이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글씨도 모르는 아이를 돌볼 때는 소용없습니다.
기본적인 육아 지식이 없는 초보 아빠들이 아이들을 혼자 돌본다면(초보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구전(口傳), 인터넷 검색이 다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잘못했을 때 부모는 처음에는 잘 참지만,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고 소나기처럼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퍼붓습니다. 아이는 화가 잔뜩 난 부모의 모습과 목소리에 울게 됩니다. 흥분한 상태에서 아이가 울면, 측은하다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더 화가 납니다. 그러니 “울지 마!”라고 재촉하게 되고, 아이는 더 울게 되죠. 심할 때는 체벌도 가하게 됩니다. 아이는 무서워서 울음도 참고, 잘못했다고 빌기도 합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라고 하면서 부모의 말에 순응합니다.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심한 꾸중으로 아이를 순종적으로 만든 경험은 이후에도 계속 활용하게 될 무기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무기는 긍정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부모는 기본적인 육아서를 읽고 학습해야 합니다. 저도 안아를 돌볼 때 화도 많이 내고 심지어 체벌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련한 육아서를 읽으면서 제가 했던 행동이 잘못됐음을 알았고, ‘절대로 체벌은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다짐과 함께 이후로 체벌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가끔 모질게 화를 내긴 합니다.
3. 아이의 일과를 기록하자
육아는 기록이 중요합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의 먹는 양부터 자는 시간까지 다 체크해서 정리합니다. 그런데 아빠들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육아를 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일정 기간 육아를 해야 한다면, 기록은 굉장히 편리한 육아 보조자가 됩니다.
아이들은 먹고, 자는 등의 기본 생리 활동이 일정 기간 규칙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지난 기록을 훑어보면, 오늘 아이의 패턴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제가 둘째를 거의 혼자서 돌볼 때 매일 먹고, 자고, 싸는 등의 일정을 수첩에 정확하게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가 한 주정도 쌓이니 둘째의 오늘 일정을 예측할 수 있었죠.
예를 들면, 둘째는 하루에 낮잠을 세 번 잤습니다. 각각의 낮잠은 한 시간 내외, 한 시간 삼십 분 내외, 두 시간 내외로 시간이 달랐습니다. 수면 시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잠들면, 개인적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4. 육아는 가족의 총행복을 크게 한다‘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육아는 행복의 총합을 크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육아와 관련해서 설명한 책은 육아의 곤욕스러움을 많이 써놓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대부분 동감합니다. 육아는 절대로 쉽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설문조사에서는 부모를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따져봤습니다. 한 아이만 있을 때 부모의 행복지수는 이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둘 이상이 될 때 행복지수는 낮아졌습니다.
아이의 웃음과 사랑스러움은 금세 지나갑니다. 하지만 아이의 용변을 갈아주고, 우는 걸 달래주고, 밤잠을 설쳐야 하는 일상 등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니 아이의 웃음으로 이 모든 것을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부모의 행복지수는 떨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족 행복의 총합은 커집니다. 부모의 행복지수는 떨어질지 몰라도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돌봄으로 안정감과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의 행복지수가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아이의 행복지수가 더해지면, 가족 전체의 행복지수는 커집니다.
5. 육아는 공동의 의무다육아는 여성, 엄마, 아빠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오마스 족의 격언 중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온 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 가족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독박 육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아이를 돌본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육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많은 육아와 관련한 책에서 단 한 명만이라도 아이를 잘 케어해주면, 아이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좀 바꿔서 생각하면, 주변의 여러 사람이 아이를 사랑으로 돌봐준다면 그 효과는 더 클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필요할 때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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