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한겨울, 대구의 작은 출판사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담배를 끊어 나라 빚을 갚자”는 한 문장의 구호가 신분과 계층을 초월한 전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진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이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조선 백성들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대구 광문사 서상돈, 김광제의 작은 아이디어로 시작해 대한매일신보의 캠페인성 보도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은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 퍼져나간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일제의 경제 침탈과 13만 원의 족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교묘한 술수를 부렸다. 근대화 사업과 철도 부설이라는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은 1907년에 이르러 1,30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일제는 이 빚을 미끼로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려 했고, 마침내 수조권(세금 징수권)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시기 대구의 어느 출판사 광문사의 부사장이었던 서상돈은 김광제 사장에게 획기적인 생각을 말했다. “2천만 동포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보태면 어떨까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던 이 구호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한매일신보」의 영국인 사장 베델과 편집인 양기탁은 이 운동을 전국에 알리는 데 앞장섰고, 신문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해 전국 각지에서 답지하는 의연금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시대상 차별받고 있던 다양한 계층의 여성 참여는 국채보상운동의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으겠다는 결의를 모았던 문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 신분의 벽을 허문 전국민의 참여
「국채보상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과 계층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었다는 점이다. 고종 황제가 친히 단연(斷煙)을 선언하며 운동에 동참했고, 이는 조정 대신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양반에서 상인, 군인에서 학생, 기생에서 걸인까지, 그야말로 전 계층이 참여한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여성 단체들이 조직되어, 대를 이어 물려받은 귀한 패물을 헌납했다. 심지어 도둑들조차 훔친 돈이 국채보상금이란 걸 알고는 되돌려주며 추가로 기부하는 일도 있었다. 해외 유학생들과 교포들도 힘을 보탰다. 일본 유학생들은 단연회를 조직했고, 로스앤젤레스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교포들도 정성을 모아 보냈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국채보상운동은 해외 동포들에게까지 확대된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좌절된 미완의 국민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 좌절된 꿈, 그러나 남은 희망
안타깝게도 이 운동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1년 6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모금된 272,689원은 애초 목표였던 1,300만 원에 크게 미치지 못했고, 이 돈마저 일제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단순한 모금운동이 아닌, 국민이 하나 되어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자주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110년이 지난 2017년,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 2,475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온전히 보존된 이 기록물들은, 세계 최초의 전국민적 모금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도 하나 된 마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던 우리 민족의 저력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어떤 도전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준다.
국채보상운동은 좌절되었지만, 이 동려은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지며 독립을 위한 경제적 투쟁으로 지속된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윤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