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突擊艦)으로 활약한 거북선(龜船)은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제작한 전라좌수영 귀선, 전라좌수영 소속 방답진에서 건조한 방답 귀선, 마지막으로 전라좌수영 소속 순천부 귀선 등 모두 3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하였고, 이후 한산도 통제영으로 이동한 후 2척을 더 건조해 총 5척의 거북선을 보유하였습니다. 또한 1595년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한산도에 5척이 있다'라고 명기된 사안을 보아 임진왜란 당시 총 5척의 거북선을 운용한 것은 맞는 듯합니다.
거북선의 주된 임무는 돌격함으로 적선의 진을 흐트러뜨리는 역할이 가장 큽니다.
이런 임무로 인해 거북선은 적 함대들 속으로 파고들어 초근접전을 펼칠 수 있는 전술을 위해 기존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지붕을 덮고 포문을 겸한 용머리를 달아 개량한 돌격 함선이었습니다.
1. 거북선의 형태와 구조
①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형태와 구조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원형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료나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선조수정실록과 이순신의 장계 초안 집인 임진장초(壬辰狀草) 내,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관한 내용에 거북선의 대략적인 형태와 구조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존재합니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 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보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0번째 기사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현·황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 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적들도 철환을 비 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임진장초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만력 20년(1592) 6월 14일 자 장계 초안
두 기록을 토대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형태와 구조를 요약해 보면, 판옥선을 개조하여 덮개를 덮어(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의 좁은 길을 낸 덮개) 덮개 위에는 수많은 쇠못을 꽂아 (덮개로 인해)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덮개 위에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거적이나 풀로 위장하여 적이 뛰어오르면 찔리게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거북선의 덮개엔 송곳만 아니라 칼날도 함께 꽂혀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배의 앞부분에 용머리를 달아 용 아가리에서 포를 발사했으며, 배의 양쪽 좌우에는 6개씩의 포혈이 있어 양측 면에서도 각 6문의 포(총 12문)를, 배의 후면인 꼬리 쪽에도 포를 발사할 수 있는 포혈이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거북선은 사면으로 함포를 발사할 수 있는 구조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형 함포인 천자포(天字砲)와 지자포(地字砲), 중·소형 함포인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 모두를 발사할 수 있는 큰 선체로 이루어진 튼튼한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외부 구조나 실내 구조 등 자세한 구조와 그림과 같은 외부 형태를 알 수 있는 사료나 유물 자료들이 없기에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논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외에도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문집인 간재집(艮齋集)에서도 거북선의 기록이 확인됩니다.
등 부분에 창검(槍劍)을 붙이고, 머리 부분에는 쇠뇌를 숨겨 설치하며, 허리 부분에는 판옥(板屋)을 두고 그 가운데 사수(射手)를 들어가게 하며, 옆으로는 사혈(射穴, 활 쏘는 구멍)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하여 가운데는 총통(銃筒)과 대부(大斧, 큰 도끼)를 두고 때려 부수기도 하고 철환(鐵丸, 철로 만든 탄환)을 쏘기도 하며 활을 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1592년(선조 25) 경기도 이천에서 군사를 통솔하던 왕세자 광해군에게 올리는 글
또한 간재집에는 거북선의 모습을 그린 귀갑선도(龜甲船圖)가 수록되어 있는데, 개판을 곡선이 아닌 직선의 다각형으로 그려 두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거북선 개판이 6각형 혹은 8각형의 다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② 조선 후기 거북선의 형태와 구조
조선 후기 거북선에 관한 대표 사료로는 1795년(정조 19)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습니다. 이 이충무공전서에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도설(圖說)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제작한 거북선이 아닌 정조 때의 거북선을 그린 입니이다. 이 중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크기에만 가감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자료와 상충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엔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의 행록(行錄) 기록이 담겨 있는데, 행록을 인용한 글에서 거북선 측면의 포혈(砲穴)이 6개라고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그림에 나오는 포혈은 더 많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 모습은 이순신의 임진장초나 이분의 행록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외의 거북선 기록은 충청남도 아산의 이순신 종가에는 조선 후기의 거북선 그림이 남아있습니다. 개판 위에 장대(將臺)가 그려져 있어 조선 후기에는 외부 척후와 지휘를 위해 거북선에 장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영조 때의 신경준(申景濬)의 시문집인 여암전서(旅菴全書)에서도 "거북선의 아랫부분 선체는 전선(판옥선)과 같은 모양이다."라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영조가 거북선에 대해 질문하자 조문명(趙文命)이 ”형체는 같지만 제도는 다르니, 거북의 모습처럼 양옆을 가려서 덮은 것이다.”라고 대답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③ 거북선 구조의 논쟁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그림들은 임진왜란 200년 이후의 자료입니다.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과는 형태상 차이가 있고 선체는 커졌습니다. 선수 용머리의 함포 발사 구조가 연기 분출 구조로 바뀌고, 덮개(개판)의 쇠못이 없어지고, 선미 거북꼬리와 그 아래 포혈이 없어졌습니다. 특히 포혈 개수가 증가하여 이로 인해 내부 구조는 2층설과 3층설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2층 구조론에 따르면 아래층에는 병사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화포 등의 공격 시설이 배치된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경우 노를 젓는 노역이 화포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 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이러한 거북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3층 구조론에 따르면 1층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군량·무기고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와 격군(노 젓는 병사)이 자리하며, 3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노역의 위치가 2층 구조론의 주장과 달라지고, 전투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상반됩니다.
현재는 2.5층 구조의 거북선 설이 대세이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거북선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기에 잠시 미루는 바입니다.
④ 거북선의 크기
역시나 이충무공전서에 정조 당시의 거북선 크기에 대한 자세한 제원이 나와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의 제원 치수는 아니지만, 정도 대의 거북선 크기에 관한 제원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거북선 제원에 관한 부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매우 잘 정리되어 있어 대신하는 바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모습과 규모에 대해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없다. “크기가 판옥선만 하다"라는 언급을 통해 거북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판옥선의 정확한 규모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정조 19년(1795)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이순신의 사후 그를 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정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은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일기·장계와 그를 예찬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문, 비명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인데,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2)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 배의 외판, 바깥판)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艣版, 배의 전면부)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 돌노쇠 구멍)을 두었다.
4) 주판(舳版, 배 뒤쪽 고물)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5)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머리에 서까래가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은 모습이다.
6)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패(牌,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7)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있다.
8)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9) 뱃머리에는 거북머리[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10)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11)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12)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礟穴)을 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礟穴) 한 개씩을 두었다.
13)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으며 ‘귀(龜)’자가 적힌 기를 꽂았다.
14)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 갑판)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15)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한 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16)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 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통제영 거북선의 대체적인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여장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바로 거북 뚜껑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 머리의 위아래 4개, 배 위의 거북 등에 12개가 설치되었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치수·길이·넓이 등은 같지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판옥선의 여장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뚜껑을 씌운 듯한 모습이다. 거북 머리 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새겼고, 덮개 위에 거북 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포 구멍은 거북 머리 아래에 2개, 현판 좌우에 각각 1개, 현의 난간 좌우에 각각 10개, 덮개 판목 좌우에 각각 6개씩 있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를 설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거북선(龜船)
2. 거북선의 임무와 전술
글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거북선의 주 임무는 돌격함으로써 적선의 진을 흐트러뜨리는 역할이 가장 큽다.
이런 임무로 인해 거북선은 늘 적 함대들 속으로 파고들어 초근접전을 벌이며, 이곳저곳의 적선들을 박살 내어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 후방에 있던 판옥선들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적선들의 근거리로 다가와 함포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거북선의 함포 공격에 적선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후방에서 전진해 오는 적선들에는 그 자체로 장애물이 되어, 거북선이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적 함선들의 정체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투의 상황이 조선 수군에 유리한 조건이 갖춰지면 대장선으로부터 거북선의 후퇴를 명하는 신호(깃발 및 악기, 방패연)가 전달됩니다. 거북선들이 전장에서 빠져나온 후엔 적선들에 서서히 다가오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 선단이 진용을 갖춰 일제 함포 사격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전투는 마무리됩니다.
이 같은 전략과 전술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전술을 보면, 좁은 곳에서 적선들을 유인해 넓은 해역에서 대파하는 전략이 많았습니다.
좁은 해역에서 넓은 해역으로 빠져나오는 과정도 적선들에는 1차 걸림돌(장애물)이 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거북선들은 적 선단을 분리하는 전술을 펼치기도 하여 전장을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었습니다.
조선 수군이 늘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 모든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거북선이란 특수 임무의 돌격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거북선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전 병기는 아니기에 적선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돌격선 일뿐 실제 해전의 승패를 가르는 함선은 주력함인 판옥선입니다.
여기까지는 그간 학계와 연구가들의 통설적인 내용을 정리하였을 뿐 판옥선 연재 글과는 대조적으로 그림도 없고, 3D 복원 이미지도 없는 지루함을 참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저의 생각과 3D 디지털 복원을 통해 얻은 데이터들을 토대로 기술하려 합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