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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출산, 육아: 이론과 현실의 괴리

※연재: 양심약사 양성심의 호떡장사 이야기(2)

칼럼니스트 양성심 승인 2024.11.24 14:21 의견 0

첫아이를 임신하고 나자 나의 삶은 완전히 아이에게 초집중하게 됐다.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태교와 영양 관리에 힘쓰게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나와 뱃속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생활이 이어져갔다.

임신기간 동안 먹는 음식이 아이와 나를 잘 지켜줄 거라는 믿음에 가공식품을 피하고, 중금속 오염을 피하려 큰 생선류는 안 먹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임신기간 내내 혹여 발목이 삐끗하여 아이가 잘못 될까봐 등산화를 신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제가 임산부입니다. 부딪히면 안 돼요!”하는 의사표현을 하고 싶었다. 2004년에 이미 임산부 표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할 정도였는데 최근 임산부 표식이 보급되고 전철에 임산부 좌석도 생기는 것을 보니 유별나게 내가 빠른 편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태교를 위해서 아기의 배냇저고리를 만들면 좋다고 해서 바느질도 해봤지만, 바느질하는 첫날 날밤을 새우며 바느질만 하고 있는 나의 성향에 질려 하루만에 포기하기도 했다.

당시 소규모 약국을 나홀로 운영하던 시기였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운동하러 다니고, 뒷산을 꾸준히 걸으면서 태담을 나누고... 드라마 속에서처럼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먹여준다는 일념으로, 정말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리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 다시 그 시간을 회상하니 임신기간의 기대감과 기쁨이 떠올라 또다시 행복한 마음이 든다.

아이가 태어난 후, 임신기간 관리가 잘 된 덕에 심한 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잘 키울 수 있었다. 태중에서의 교감 덕분인지, 영양상태가 좋아서인지 신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잠도 잘 자고 잘 먹고.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할 때도 태어난지 4주 된 아이를 데리고 약국으로 출퇴근할 정도로 나는 열혈엄마였다. 아침에 아이와 함께 약국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1,000일이 넘는 동안,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날들이었다.

약국에 아이를 위한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할 수 있어서 육아와 업무를 병행할 수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국이 한가한 편이였다. 이 때문에 육아를 위해 새로운 사람을 고용할 만한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지만 천 기저귀를 황토물에 담궈 직접 황토 기저귀를 만들 만큼 유별나게 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9개월 된 아이가 어린이집에 첫 등원할때 선생님께 “칭찬상으로 사탕을 주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씀을 드릴 말큼 유별난 학부모였다. 어린이집에 다니면 아이들이 병치레를 잘한다는데 다행히 큰 병치레 없이 잘 컸고, 다쳐서 피치 못해 항생제를 먹여야했던 5살까지, 병원 한 번 가본 적이 없이 매우 건강하게 잘 커 주었다.

처음 아이가 옆집에 놀러 가 기성 과자를 접했다. 급하게 먹어서인지 그날 밤 토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 키운다 한들 외부에서 순수하지 못한 음식들을 먹게 될 수 있다는 현실 파악이 되었다.

그 후에는 아이의 음식 섭취를 덜 제한하게 되었고 아이가 커가면서 신경써야 할 일들이 식생활 외에도 너무 많아지니 나도 좀 느슨해지게 되었다. 어린이집과 학원을 통해 아이와 함께 사회생활을 하게 되니 더더욱 무방비로 손을 놓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약사 엄마라고 더 까다롭게 한다는 인식을 주지 않으려고 했고, 세상과 어울리는 것에 더 중점을 두게 되니 나도 별수 없이 일반인들처럼 빗장이 풀리게 되었다. “이런 거 먹으면 안 되는데”하는 지식과 “어쩔 수 없다” 혹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현실과의 타협은 언제나 나의 맘을 불편하게 하였다. 그때부터인지 직접 음식을 개발해 보자는 생각이 태동한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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