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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리제너레이션(3)] 대학로 문화 시설의 입지 변화와 도시 영역확대

문화적 도시재생 1번지-대학로 ③편

김동복 기자 승인 2020.02.26 13:33 | 최종 수정 2020.05.21 20:54 의견 0

이번 회에서는 대학로가 서울의 대표적인 소비공간으로 변화하게 된 시점과 그 이후 변화된 대학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이주 후 대학로는 국가정책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구축된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 예술 공간이 되었다. 특히 1985년은 정부가 대학로 적극적이고도 의도적인 공간 구축을 시행한 시기다.

대학로의 랜드마크였던 마로니에 공원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1975년: 마로니에 공원이 청년문화를 꽃 피우다

대학로가 이렇게 시끌벅적해진 것은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이전하고 나서부터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 조성하며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이 옮겨간 뒤, 그 자리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원의 이름을 <마로니에>라 했는데, 경성제국대학 시설에 심은 마로니에 나무(다른 말로 ‘가시칠엽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름을 정한 1976년 3월부터 대학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로는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불렸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인해 80년대의 대학로는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청년문화를 꽃피우는 장소가 되었다. 곳곳에서 거리공연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서울 각지의 대학들이 연합행사와 집회를 열던 장소였다. 한편으론 탈선과 퇴폐의 공간으로 지적 받기도 했다. 항시 한쪽에서 막걸리 판이 벌어지자, 음주와 불량스런 집단행동이 문제가 되었다. 서울의대 학생들이 음주행위가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서울대 캠퍼스가 이전한 빈 공간을 정부가 설립한 문화단체들이 채워나갔다. 197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경성제국대 본관에 이어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197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관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1974년 종로구 관훈동에 설립되었던 문예진흥원 미술관(현 아르코미술관)은 197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1981년에는 문예진흥원 예술극장(현 아르코 예술극장)이 들어섰다. 1989년에는 1천 석 규모의 대극장인 동숭아트센터가 건립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불리던 대학로가 연극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모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된다.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인 아르코 예술극장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1985년: 차 없는 거리 실시 후 문화예술의 거리로...

대표적인 문화단체들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신하지는 않는다. 계기를 마련한 건 1985년 5월 5일 서울특별시가 시작한 ‘차 없는 거리’ 정책이었다. 이화사거리에서 혜화로터리로 이어지는 주가로를 ‘대학로’로 지정한 후, 주말마다 ‘차 없는 거리’로 만든 것이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문화정책을 추진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문화의 거리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1985년 ‘차 없는 거리’ 실시가 중요한 이유는 이후 ①문화시설의 입지 변화, ②도시영역의 확대, ③대학로의 소비 공간화 등이 이어지며 탈바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 문화시설의 입지 변화

서울특별시가 매 주말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한 구간은 이화사거리부터 혜화로터리에 이르는 길이 1.2km 6차선 도로 구간이다. 차 없는 거리 지정과 더불어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하며 문화지구로서 잠재력이 부각되자, 신촌 일대의 소극장들이 대학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샘터파랑새극장과 마로니에극장을 비롯해 바탕골소극장, 성좌소극장, 연우소극장, 대학로극장 등 10여 개의 소극장들이 개관하면서 연극 클러스터(Cluster)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대학로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주말의 ‘차 없는 거리’를 통해 젊은 예술가는 물론 아마추어 공연 등 다양한 거리 공연이 생겨나 대학로가 지닌 젊음과 낭만의 거리라는 이미지에 예술의 거리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순수 연극보다 상업적 성격의 성인극과 코미디극이 성행하게 되자, 문화적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소극장과 극단의 영세성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알려졌지만, 일탈공간으로 변질되는 일도 벌어졌다.

2. 도시영역의 확대

1985년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어 혜화역 주변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상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소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소극장 주변으로는 카페, 레스토랑, 분식점, 오락실, 패스트푸드점, 음식점 등의 상권이 크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극장의 이전과 더불어 극단 사무실도 이전해 왔다. 전에는 학교건물 중심이었는데, 사업기능이 수용되자 대학로에도 횡적 확장이 시작되었다. 이후 소비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상업 기능이 주거기능을 대체하며 용도변경과 재건축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대학로의 도시 영역은 동숭동 동쪽으로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마로니에공원과 문예회관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문화관련 시설, 그리고 뒤쪽의 주택가로 구성되어 있던 동숭동 일대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간선도로변의 샘터화랑 등 건물 이면에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거나 개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시설과 부대시설이 입주할 공간을 없앰으로써 공연시장을 발전시키기보다 오히려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비공간으로 가득한 대학로 골목길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3. 대학로의 소비 공간화

대학로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대중소비문화 확산의 주요 거점이 되면서, 당시 서울 압구정동, 신촌에 이어 또 다른 대표적인 소비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단독주택이 들어설 자리는 소비업종을 채운 상가건물이 점유했고, 기존의 단독주택도 카페, 레스토랑, 주점, 노래방, 편의점 등으로 변모했다.

소비업종의 과열로 인해 청소년 탈선의 온상이 되기도 하면서 퇴폐·향락 문화의 공간이라는 여론이 형성되며 비판받기도 했다. 극단의 형편도 어려워져 상업적인 연극이 늘어나고 호객행위를 비롯한 각종 상행위가 만연해지자 순수 연극의 메카라는 이미지도 퇴색되었다. 문화·예술관련 자원들이 지역 내에서 경쟁력을 잃고 이면지역으로 이동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로는 또 한 번의 정치적 상황에 휩싸인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는 호헌철폐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유와 정의를 대표하는 거리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정의와 자유는 사라지고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데모의 거리, 탈선의 거리, 향락의 거리로 빠른 속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9년 ‘차 없는 거리’가 폐지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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