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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리제너레이션(2)] 대학로에 남아있는 문화재

문화적 도시재생 1번지-대학로 ②편

김동복 기자 승인 2020.01.30 02:26 | 최종 수정 2020.05.21 20:51 의견 0

대학로를 형성한 동숭동에는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문예진흥원, 문예회관 등 각종 예술단체와 공연장, 화랑 등 문화시설이 밀집하며 예술과 문화의 거리가 형성됐다. 오늘날 우리나라 연극의 중심지로 불릴 만큼 크고 작은 극장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문화를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며 맛집도 즐비해졌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개성있는 패션을 발견할 수 있는 복합문화지대로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대학로를 현대적인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로는 역사가 함께하는 공간이다. 이번 회에서는 대학로가 형성되기 전, 동숭동에 남아있는 조상들의 유산 중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아 보호해야 하는 대표적인 문화재를 알아보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도 문화재는 넓은 의미에서 구전(口傳), 음악, 인종학적인 유산, 민속, 법, 습관, 생활 양식 등 인종적·국민적 체질의 본질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대학로에 존재하는 문화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자.

함춘원지 (사진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함춘원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사적 제237호 <함춘원지>는 옛날 ‘함춘원’이 있었던 터다. ‘함춘원’은 조선 성종이 창경궁을 창건하며 함께 건립된 부속건물이다. 창경궁의 후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풍수지리설에 따라 궁궐 동쪽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만들기 시작해 성종 24년(1493)에 ‘함춘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함춘문’만이 ‘함춘원’의 유적이며, 남아있는 석단은 ‘경모궁(景慕宮)’의 유적이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墓)’를 이곳으로 옮겼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경모궁’으로 개칭했다. 석단은 정조가 ‘경모궁’ 일대를 정비하며 만들어진 건축물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춘원’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용되며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1973년에야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게 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경희궁에 부속된 후원도 ‘함춘원’으로 되어 있으나, 경희궁 후원의 본이름은 ‘방림원(芳林苑)’이다.

구 대한의원 본관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구 대한의원 본관

<구 대한의원 본관>은 조선 말기의 건물로 ‘대한의원’은 서울대학교 병원의 전신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1976년 11월 16일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1899년 4월 최초의 국립병원인 ‘내부병원(內部病院)’이 설치되었고 이는 1900년 6월 ‘광제원(廣濟院)’, 1907년 3월 ‘대한의원’으로 개칭됐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대한의원’ 본관은 1907년 3월에 착공되어 1908년 11월에 완공되었다. 17~18세기 유럽 네오바로크풍 건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시계탑과 시계탑 위의 둥근 지붕이 있는 격조 높은 모습이 특징이다. 건축 당시 연면적 495평에 지상 2층 건물인 본관 외에도, 1,500평에 걸쳐 7동의 병동건물, 해부실과 의학교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79년에 서울대병원 신관 건출을 위해 부속건물들은 1978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서양 의학에 의한 의료·의학교육 제도를 확충할 목적으로 치료부, 위생부, 교육부의 3부를 두었다. 원장은 내부대신이 겸했고, 의관, 약제사, 교관, 사무원, 기사, 통역관 등을 두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1907년 12월 지석영, 이규준 등 조선인 몇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스텝이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한일합방 때인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된 후 지금에 이르렀다.

구 서울대학교 본관  (사진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구 서울대학교 본관

1981년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1931년 경성제국대학 건물로 건축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관악산으로 이전하며, 동숭동에 있던 옛 서울대학교 건물은 모두 헐리게 되었다. 이 건물만 사적으로 지정되어 남아 있으며,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1930년대에 유행한 합리주의적 경향의 비대칭 건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장방형의 평면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주로 벽돌과 목재를 함께 사용해 만들었다. 지하 1개 층, 지상 2개 층의 3층 구조로 중앙 전면부는 층이 올라갈수록 차례로 후퇴하는 디자인을 채택했다. 평슬라브 옥상에 가장자리를 돌림띠로 두르고, 건물 일부분에는 곡선형을 넣어 조형미를 살리며 자유로운 느낌도 불어넣은 건물이다.

담당건축가는 일본인이었지만, 실무건축가로 한국인 일송(一松), 한국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하고 종로빌딩,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한 박길룡 등이 참여해 의미가 깊은 건물이다.

구 공업전습소 본관  (사진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구 공업전습소 본관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광무 10년)에 설립된 ‘공업전습소’가 동숭동에 지었던 여러 시설 중 하나로, 본관 건물은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설계를 맡아 1908년에 완공했다.

‘공업전습소’는 근대 공업교육기관으로 1907년부터 본과 2년과 전공과 1년의 교육과정으로 토목(土木), 목공(木工:건축), 응용화학(應用化學), 금공(金工), 염직(染織), 도기(陶器) 등을 가르쳤다. 1912년 4월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로 개편되었다가, 1916년 ‘공업전습소’가 ‘경성공업전문학교’와 ‘경성공업학교’로 분리되며 본관 건물은 ‘중앙시험소’가 사용했다.

1945년 광복 후 당시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얼마 남겨지지 않은 대한제국 시절 건물 중 유일한 목조건물이며,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79호로 지정됐다.

이화장  (사진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이화장(梨花莊)

조선시대 동숭동 낙산 언덕에 배나무가 많이 있어 그곳에 있던 정자를 ‘이화장’이라 부른데서 유래됐다. 조선 중기에는 인근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후일 인평대군 저택은 이름을 장생전(長生殿)이라 했다.

광복 직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만 박사가 거처할 집이 없자, 주변의 인사들이 장생전을 기증했고, 이를 오늘날까지 이화장(梨花莊)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생전의 일부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승만 대통령 거처 후 내각을 구상하던 조각정(組閣亭), 관리인과 이승만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 등이 남아있으며 지금은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1982년 12월 28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후 2009년 4월 28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7호로 지정되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위 기사는 로컬트렌드 미디어 <비로컬>과 인터넷신문 <시사N라이프>가 공동기획·취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제공하는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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