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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주년(3)] 이승만, 어떻게 봐야하나?

새한일보 정세민 기자 승인 2020.05.03 03:10 | 최종 수정 2020.05.05 15:11 의견 0
이승만 공식초상 (사진출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4.19혁명 60주년을 맞으며 여전히 되돌아봐야하는 인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의 공과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현재를 반성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승만, 모든 구악의 원흉인가?

현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역사관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많다. 이들에게 이승만은 미군정과 야합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방해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워 민족의 분단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인식된다.

그러다보니 최근 이승만에 대한 여론은 평가절하 수준을 떠나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얼마 전 김용옥 선생이 공영방송 프로그래에서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었다. 그의 평소 정치적 입장을 감안한다면 그리 놀라운 발언이라 볼 정도는 아니지만 공영방송에서 대놓고 초대 대통령 묘지를 파내야 한다는 주장은 일반 국민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다.

김용옥의 역사관은 해방 후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신탁통치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가에서 보수의 입장과 대립한다. 그는 신탁통치를 좋은 것이라 주장한다. 해방 당시 국민정서가 신탁통치를 또 다른 식민지배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그의 주장은 “신탁통치를 해서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반쪽짜리 분단국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의미다.

◇이승만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국제정세를 보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북한에 사실상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단정(單政) 선언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승만의 반소련, 반공산주의 노선을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6.25가 김일성과 스탈린의 치밀한 계획과 협조하에서 일어났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 마당이라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김용옥 선생의 주장은 해방 직후 좌익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일반인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이상적 허구에 불과하다. 물론 당시 이승만이 정치적 수세에 몰리자 반탁운동을 이용해 지지세력의 결집을 노렸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제 36년의 지배에 이를 갈던 사람들에게 5년만 더 참으라는 말이 좋다는 주장은 쉽게 볼 수 없는 논리일 것이다.

이승만의 반소반공 노선을 그의 기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 보든, 탁월한 국제정치 감각 때문이라고 보든, 하다못해 광적인 친미성향 때문이라고 보던지 지금에 와서 돌이켜 봤을 때도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지금 펼치고 있는 이야기는 건국절(建國節)을 만들자거나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추대하자는 주장이 절대 아니다. 4.19혁명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든 간에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리를 박탈할 수 없고,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분연히 일어나 저항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주었다.

이승만은 원자력 기술도입에 유난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은 1957년 7월 14일 서울 공릉동에서 있었던 트리가 마크2 연구용 원자로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는 장면이다.  (사진출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공헌은 공헌대로 인정해야

이는 오히려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근대적 실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세운 민주공화정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축출을 당한 불행을 당했지만, 그가 근간을 구성한 국가정책들은 이후 낙후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데 공헌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민족과 국가가 나아갈 바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기에 미국을 움직일 수 있었고, 반소·반공 노선을 걸었기에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기에 지금과 같은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그의 공과를 떠나 우리의 생존권을 지켜낸 그의 탁견이었다는 점을 부정해선 안 된다.

이승만의 공로에 대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하나 들자면 원자력 발전을 꼽고 싶다.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로 겨우 살아가던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선 대량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원자력발전이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당시에도 한 사람당 6,000달러를 들여가며 미국에 유학을 보내 원자력을 공부하게 했다.

이런 기조가 남한은 원자력을 평화롭게 개발해 경제발전에 활용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북한은 전쟁을 준비하려는 목적으로 원자력을 개발해왔다. 이것 하나만 봐도 남북한이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는데, 그 시작점을 누가 찍었냐에 대해서는 편견을 깨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운의 인물 이승만

끝이 좋다면 모든 것이 좋고, 그 반대로 끝이 안 좋으면 다 안 좋은 것인가?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하와이 망명 길에 오른다. 하와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고향이긴 했지만, 말년을 보낸 이승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구한말에 태어나 개화기를 지나서 일제 강점기를 견디며 끝끝내 권력에 정점에 섰던 사나이. 하지만 그를 능가할 상대가 없어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산하게 무너져내린 독재자.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칭송에서부터 민족을 분단으로 치닫게 만들어 전쟁이 일어나게 만든 민족의 반역자라는 악평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평가는 아직도 논란에 휩싸여 있다.

국민이 찍어버린 거목(巨木) 이승만. 그를 필요악(必要惡)적인 인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기여하고 자신이 출범시킨 민주공화정에 의해 축출된 비운의 인물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4.19혁명이 일어났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4.19혁명을 돌아보며 그가 걸어온 길과 대한민국이 걸어갈 길을 숙고해보고자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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