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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70주년] 희미해지는 기억, 전쟁은 다시 시작될까?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6.25 11:30 의견 0
https://www.youtube.com/watch?v=whH9_trnfYs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역사의 연속성과 함께 현재의 해석에 따라서 과거사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관점에 따라서 똑같은 사건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현재는 과거를 역사로 기억해야 할 만큼의 시간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이 항상 또렷할 수 있을까?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기억을 억지로 붙잡다가 왜곡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의 왜곡이 진실에 굴곡을 만들어 역사가 되기도 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과연 전쟁은 70년 동안 같은 모습으로 기억됐고, 후손들에게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졌을까?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을 경험했던 세대 대부분이 흙으로 돌아간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전쟁은 70년 전 우리 선조들과 같을 수 있을까?

◇왜 6·25전쟁이 시작됐을까?

과거 운동권은 6·25전쟁의 ‘남침 유도설’을 굳게 믿었다. 지금도 팩트 체크를 하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현재진행형이다. 팩트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인간인지라, 사실은 믿음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과 구 소련의 불법적인 기습이 전쟁의 모든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러 남침을 유도하려 했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부러 빌미를 제공해서 침공당하고, 수도를 3일 만에 내어주는 연출을 누가 시도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미 구 소련의 비밀문서 공개로 구 소련과 북한의 합의로 개시된 전쟁임이 드러났음에도 아직도 음모설을 받드는 저의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발발했을까? 교과서적으로 살펴보면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구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의 문제였다. 세상에 1등은 오직 하나여야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강국은 원래 한 번 정도는 붙어야만 할 운명이었다. 그 힘겨루기 장소가 한반도였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청일전쟁(1894~1895년), 러일전쟁(1904~1905년) 등 다른 강대국들의 씨름판을 열심히 제공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50여 년 전에도 내줬던 싸움장을 또 만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대한민국이 강국이 아니었고, 역사를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국민이 어느 정도 사라졌을 즈음, 전쟁의 공포를 체험하지 못한 국민으로 한반도가 가득 찼을 시기에 전쟁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

당시 국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38선으로 두 동강 난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강대국이 원해서 국토가 나눠진 것이다. 애써 해방의 원인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독립운동가의 힘을 강조해 보지만, 기본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국력과 무력이 일본을 누르지 못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 것이다.

이후 분단에는 국내 지도자들의 위선(僞善)도 한몫했다. 어차피 통일이 어렵다면 반쪽짜리 영토에서라도 절대적인 권력을 쟁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자 김구의 통합 노력이 있었으나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했다. 이미 남북 어디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김구 또한 회생을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인데, 본문에서는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려 한다. 전쟁이 발발한 이유는 국제·국내적인 전략과 더불어 당시를 살았던 민중 또는 국민의 무지함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후, 민중은 같은 마을 사람들을 폭행하고 죽이는데 서슴지 않았다. 전쟁과 함께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생명체로 변신한다.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같아야 함을 주장하면서 조금의 차이만 보여도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많이 학살됐다. 반대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야하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전쟁통에 애국과 십자군이라는 명분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한다. 이렇게 이념과 종교가 전쟁 중 살인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해줬다.

그러나 이념과 종교는 민중의 언어가 아니다. 민중은 이념도 모르고, 교리도 몰랐다. 그저 내 아버지를 때리고 죽이면, 나도 그 사람의 가족을 죽여 복수하려고 했다. 선을 가장(假裝)해 권력을 차지한 위정자들도 문제였지만, 이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민중의 수준도 동족상잔의 비극에 원인을 제공했다.

◇희미해지는 전쟁

2020년으로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세월은 당시 참전 용사들의 기억을 육체와 함께 무덤에 묻어버렸다. 이제 전쟁의 기억은 글로 남겨진 문장이나, 대를 이어 건너온 굴곡진 이야기만 남았다.

전쟁은 아니지만 좀 더 시간적 근거리의 기억을 하나 꺼내 보자. 광주 민주화 운동은 40년이 지났다. 긴 시간이긴 하지만, 6·25전쟁과 비교할 건 아니다. 그런데도 광주 이야기를 이제는 광주 시민 중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냥 그때 많이 죽었다고만 알고 있다. 세 집 건너 한 명이 죽었다고 들었다는 사람, 당시 광주 시민의 3분의 1(약 2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허구를 사실이라 믿는 사람...

40년도 이러한데 하물며 70년이 지난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의 왜곡은 얼마나 심할까? 팽팽했던 피부가 노화되면 주름이 생겨 젊은 시절의 얼굴을 찾기 힘든 것만큼이나, 희미해지는 기억에도 주름이 생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사실도 많을 것이다.

20세기 말만 해도 역사는 교훈을 의미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용됐다.

그러나 이런 교훈적인 메시지는 그 기억이 진실일 때 가능한 말이다. 기억이 왜곡됐을 때, 오히려 왜곡된 폭력이 가해질 수 있다. 영화 <메멘토>는 왜곡된 기억의 기록이 낳는 잔인한 폭력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전쟁 이후 : 한민족일까? 두 민족일까?

과거에는 우리 모두가 단군의 겨레라며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민족의 기준은 제각각이겠지만,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야 하며, 언어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남과 북은 시간과 공간이 다르며 언어도 이질감을 더해가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걸 기준으로 한다면, 남북은 여전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남이 ‘서기’를 사용하는 데 반해 북은 ‘주체 연호’를 사용한다. 이는 시간 개념이 다름을 의미한다. 남은 박정희 시대에 단기에서 서기로 전환했고, 북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1912년)을 기점으로 주체 연호를 사용한다. 국호의 제정에서도 역사 계승의 차이가 드러난다. 남한은 과거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한(韓)’을 넣어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고 한다. 반면에 북은 고조선의 ‘조선’을 계승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한다. 이쯤 되면, 서로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하는 말도 억지가 아닐까?

다음으로 공간개념을 살펴보자. 남은 헌법에서, 북은 노동당 규약에서 공통적으로 한반도와 부속 도서를 서로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영토 범위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은 남북 모두 상대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다. 다시 말해 엄연히 존재하는 남과 북은 서로의 정체(政體)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이는 같은 공간에 사는 민족이 아니라 인식하려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북이 남을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영토 조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할지 모르나, 속뜻을 이해하거나 전문적인 용어를 이해하려면 별도의 사전이 필요하다. 국어를 북한어로 번역했을 때 웃음이 만개하는 현실은 이미 언어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우매한 질문을 던진다면, 남과 북은 여전히 하나의 민족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가공의 상징적 인물 ‘단군’일까? 아니면 70년 전까지 쉽게 왕래했던 과거 역사가 아직도 민족의 끈을 연결해 주는 것일까? 2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3년간의 지옥도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오히려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할 때 한민족이라는 말이 우스워진다.

◇종전(終戰)을 향해

6·25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 번도 종전이 선언되거나 평화협정이 맺어진 적이 없다. 오직 정전 협정 하나만으로 70년을 이어오고 있다. 정전은 일시적인 전투 중단을 의미하는 말로 영어식 개념으로는 ‘cease-fire’라 언급한다. 그런데 특이하게 당시 맺어진 정전 협정문은 영문으로 ‘KOREA ARMISTICE AGREEMENT’라 작성돼 있다. ‘ARMISTICE’는 주로 ‘휴전’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언급한 두 단어의 차이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번역을 잘못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휴전’ 대신 ‘정전’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휴전 상황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진실을 제대로 밝히려면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정전과 휴전, 모두 전쟁의 중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라도 개전(開戰)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70년 동안 수많은 국지전이 있었으나, 전쟁이라 할만한 대규모 전투가 없었기에 평화 시대를 누린다고 착각할 뿐이다.

정전 이후 70년간의 공백은 전쟁을 잊게 했다. 아무리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고, 핵 실험을 한다 해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최근 북한의 도발(남북연락 사무소 폭파)에도 일반 국민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 상대적으로 북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도 북한은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을 포기하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정상 회담을 여러 번 반복했지만, 이 또한 상징적인 행위일 뿐 기본태도의 변화는 없었다. 정상 회담의 진실 또한 당시 정상들의 마음속에만 담겨 있는 역사적 흔적일 뿐이다.

게다가 전쟁의 종결은 각 정부의 의지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현 상황 유지가 남북에 들어선 두 정권의 의지이다. 다시 말하면, 종전(終戰)은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의 결심과 상관없다는 말이다. 독일 통일사례를 보자. 영원하리라 여겼던 베를린 장벽을 독일 국민이 부숴버리며 역사가 급진전했다. 그 역사적 붕괴를 국제 정치학자들은 냉전의 해체로 이해하고, 다른 학자들이 거시적으로 해석했지만, 역설적으로 장벽을 부순 주체는 독일 국민이었지 정치인들이 아니었다. 정치인이든 학자든 대세를 그대로 인정하는 역할에 불과했을 뿐이다.

6·25 전쟁의 끝도 정치인들이나 군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야합으로 종전이 선언되고 이후 통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국민이 이를 거부한다면 종전과 통일은 한낱 두 정상의 빛바랜 과업에 그칠 것이다.

◇전쟁은 다시 시작될까?

앞으로도 군사적 충돌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남과 북 모두 군사적 전쟁으로 얻을 게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고 북한군이나 공산당으로부터 많은 걸 빼앗겼던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고 있다. 목소리가 크기에 그간 이를 듣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동요되기 쉬웠다.

요즘 세대는 그런 확성기로 소리치는 노인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을 전혀 모르는 세대의 ‘안보 불감증’은 전쟁을 공포 영화나 서바이벌 게임 정도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세대를 꼰대들은 ‘어린 것들’이라고 부른다.

수십 년 전 6월이면 항상 방영했던 <똘이 장군>에서 북한의 지도자는 항상 거대한 돼지로 등장했다. 인민의 고혈(膏血)을 착취한 이미지를 살진 돼지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긍정적인 이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혐오에서 호감 쪽으로 분위기가 돌아섰다. 북한 지배계급의 착취는 달라진 게 없는데, 이미지를 전하는 매체가 개입해 이미지를 바꾼 것이다.

군은 항상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집단이다. 항상 전쟁 가능성을 염두하고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는 극단적 집단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그렇지 않다. 전쟁 가능성이 커도 평화에 대한 바람이 더 크기에 현실의 상황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고싶어 한다. 정말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지금까지 설명한 뛰어넘지 못할 여러 가지 간극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됐다. 기억의 왜곡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부류와 진실이 뭔지도 모르는 평화만 누려온 세대들의 전쟁,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북의 지도자를 착취 돼지에서 귀엽고 호감가는 기니피그로 바꾸는 매체의 진실 왜곡과 여기에 대응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전쟁, 마지막으로 늘 호전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군측의 입장과 그런 태도를 비아냥거리면서 전투 의지를 꺾는 왜곡된 평화주의자들의 전쟁은 아직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50여 년이 지난 후, 한반도는 다시 한 번 강대국의 싸움터가 됐다. 이제 6·25 전쟁 70년의 시점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언제 전쟁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물리적인 전쟁의 가능성은 적다고 하더라도 섣부른 민족 감정과 막연한 통일에 대한 염원, 위선적인 정치지도자와 무지한 대중들의 결합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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