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에서 노선으로: 박현채·이대근 논쟁의 운동권 수용

1985년 박현채와 이대근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대학가 서클들은 이 논쟁을 집중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했다. 학술 논쟁은 곧 운동의 노선 논쟁으로 전환되었다.

어떤 서클은 박현채의 입장에 공감했다. 광주에서 목격된 미국의 역할, 계속되는 주한미군의 존재, 미국 자본의 영향력 등은 박현채의 '신식민지' 규정이 현실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이들은 박현채의 이론을 학습하며, 한국 사회 변혁의 핵심 과제는 미 제국주의를 축출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서클은 이대근과 김수행의 입장에 공감했다. 1980년대 후반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경제 성장, 급속히 늘어나는 노동자 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폭발 등은 이대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규정이 현실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이들은 『자본론』을 학습하며, 한국 자본주의는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핵심 과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1985년의 학술 논쟁은 1986~1989년 사이 운동권 내부에서 두 개의 거대한 노선으로 분화되었다. '민족 해방(NL)'과 '민중 민주(PD)'였다.

❚민족 해방(NL) 노선의 형성: 박현채 이론의 실천화

1980년대 후반, 박현채의 신식민지론에 동조하는 세력은 점차 'NL(National Liberation, 민족 해방)' 노선으로 체계화되었다.

NL 노선은 박현채의 이론적 틀을 따라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더 나아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했다. NL 노선을 따르는 이들이 보기에 한국의 모든 문제는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 재벌의 착취도, 군부 독재도, 심지어 분단까지도 모두 미국의 지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NL 노선이 제시한 혁명의 성격은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NLPDR)'이었다. 박현채가 강조한 대로, 먼저 미국 제국주의를 축출하고 민족적 독립을 달성한 후,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 정권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NL 노선의 핵심 구호는 "미제는 물러가라", "양키 고 홈"이었다. 이들은 박현채가 분석한 대로 외세 지배가 모든 모순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전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반미·반파쇼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주체는 특정 계급이 아니라 '민족' 전체였다. 재벌도 매판 자본이 아니라 민족 자본이라면 통일 전선에 포함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NL 노선은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권에서 다수파를 형성했다. 광주의 경험과 반미 감정이 강했던 시대 분위기가 박현채의 신식민지론과 공명했기 때문이다.

❚민중 민주(PD) 노선의 확립: 이대근·김수행 이론의 실천화

이대근과 김수행의 이론에 동조하는 세력은 'PD(People's Democracy, 민중 민주)' 노선으로 체계화되었다.

PD 노선은 이대근의 이론적 틀을 따라 한국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반주변부 자본주의'로 규정했다. PD 노선을 따르는 이들이 보기에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발전했으며, 재벌과 국가 권력이 결합한 독점 자본이 노동자와 민중을 착취하는 것이 핵심 문제였다.

1980년대 후반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경제 성장은 이대근의 분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자본주의는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이것이 노동자 계급을 대규모로 양산하고 있었다. 김수행이 번역한 『자본론』은 이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핵심 텍스트였다.

PD 노선이 제시한 혁명의 성격은 '민중 민주주의 혁명(PDR)' 또는 '인민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이대근과 김수행이 강조한 대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PD 노선의 핵심 구호는 "노동 해방, 세상 해방", "계급 해방 만세"였다. 이들은 이대근이 분석한 대로 계급 모순이 한국 사회의 본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핵심 주체로 보았고, 노동자-농민 동맹을 통한 민중 계급의 역량 강화를 강조했다.

PD 노선은 레닌주의적 전위 정당 건설을 중시했다. 김수행이 강조한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전위 정당이 노동자 계급을 지도하여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 직접 투신하는 '현장 파견' 활동을 중시했다.

PD 노선은 NL에 비해 소수파였지만, 이론적 정교함과 노동 현장에서의 조직력으로 운동권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CA(제헌의회) 노선의 소멸

NL(박현채 계보)과 PD(이대근·김수행 계보) 외에도 1980년대 초중반에는 'CA(Constituent Assembly, 제헌의회)' 노선도 존재했다.

CA 노선은 총파업이나 민중 봉기를 통해 독재 정권을 타도한 후, 새로운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민중이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 헌법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를 최우선 과제로 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CA 노선은 현실성 부족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NL 진영에서는 "제헌의회로 미군을 몰아낼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고, PD 진영에서는 "제헌의회로 재벌의 착취를 멈출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박현채나 이대근의 이론처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논쟁이 심화되면서 CA 노선은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사실상 NL(박현채 계보)과 PD(이대근·김수행 계보)의 양대 구도가 확립되었다.

❚주체사상 수용 논란: NL 내부의 분화

NL 노선 내부에서도 중요한 논란이 있었다. 북한의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NL 계열 내 일부 세력은 박현채의 신식민지론을 넘어 주체사상을 민족 해방 혁명의 지도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체사상이 박현채가 강조한 민족의 자주성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이념이며, 반미 통일 전선을 구축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주체사상을 수용한 세력은 '주사파'로 불렸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NL 계열 내에서 다수파를 형성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주요 학생운동 조직을 장악했다.

그러나 주체사상 수용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PD 계열은 물론이고, NL 계열 내 온건파(박현채의 이론은 따르지만 주체사상은 거부하는 세력)도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 본령에서 벗어났으며, 수령 독재를 정당화하는 교조적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주체사상 논란은 NL 계열을 '주사파'와 '비주사파'로 분열시켰다. 이 분열은 1990년대 이후까지 이어지며, 한국 진보 진영의 복잡한 분파 구도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1989년까지의 정리: 이론에서 노선으로

1985년 박현채와 이대근의 논문으로 시작된 논쟁은, 1989년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NL(민족 해방) 노선
- 이론적 기반: 박현채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한완상의 민중신학
- 사회 성격: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 주요 모순: 민족 모순 (외세 vs 민족)
- 혁명 성격: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NLPDR)
- 혁명 주체: 민족 전체
- 핵심 구호: "미제는 물러가라", "조국 통일"
- 내부 분화: 주사파 vs 비주사파

▶PD(민중 민주) 노선
- 이론적 기반: 이대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김수행의 자본론 해설
- 사회 성격: 국가독점자본주의
- 주요 모순: 계급 모순 (자본 vs 노동)
- 혁명 성격: 민중 민주주의 혁명(PDR)
- 혁명 주체: 노동자 계급
- 핵심 구호: "노동 해방, 세상 해방", "계급 해방"

1985년의 학술 논쟁은 이렇게 1980년대 후반 운동권의 노선 대립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박현채와 이대근이 던진 질문 "한국 사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 서로 다른 혁명의 길로 이어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