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부정기간행물 1호, 두 편의 논문
1985년 10월 30일, 《창작과비평》 1985년 부정기간행물 1호(통권 57호)가 출간되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기 간행물이 아닌 부정기간행물 형태로 발간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집중기획: 한국자본주의 논쟁'이라는 섹션 하에 두 편의 논문이 나란히 실렸다.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의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Ⅰ)-한국자본주의의 성격을 둘러싼 종속이론 비판」(310~345쪽)과, 경제학자 이대근(1939-)의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붙여」(346~373쪽)였다.
두 논문의 동시 게재는 우연이 아니었다. 편집진은 한국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공개적인 학술 장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서로 다른 입장의 논문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것이 이후 10년 가까이 지속될 격렬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박현채의 주장: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박현채는 1985년 당시 재야 경제평론가였다. 그는 1989년에야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제도권 학계에 진입했다. 그의 대표작 《민족경제론》(1978)은 대학가에서 '민경'이라는 약칭으로 불리며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박현채는 이 논문에서 1970년대까지 진보 진영에서 지배적이었던 '종속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종속이론은 한국 경제가 외세에 의해 파탄날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박현채는 이를 거부하고, 한국 자본주의가 비록 외세의 영향 하에 있지만 이미 상당한 수준의 내재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했다. 이 개념에서 '신식민지'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 권력과 결합한 독점 자본(재벌)이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박현채가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한국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국가와 독점 자본이 결합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성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규정은 혁명 전략에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박현채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변혁은 외세 축출(민족 해방)과 독점자본 타도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외세 지배가 다른 모든 모순의 근원이므로 민족 모순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대근의 주장: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이대근은 성균관대학교 경상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산업은행 조사부와 국제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거친 경력으로 실물 경제 데이터에 정통했다. 그는 박현채보다 5살 연하였지만, 1985년 당시 이미 46세의 성숙한 학자였다. 두 사람은 한국 전쟁과 4.19를 함께 경험한 동시대 지식인들이었다.
이대근은 같은 책에 실린 논문에서 박현채와는 다른 강조점을 제시했다. 이대근 역시 한국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했지만, '신식민지'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대근이 주목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독자적 발전과 내적 모순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한국의 독점 자본이 국가의 강력한 지원 하에 급속히 성장했으며, 이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가 확립되었다고 분석했다.
이대근은 외국 자본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자본주의를 '종속적'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는 것은 한국 재벌이 이미 독자적인 자본 축적 능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가 사적 독점을 지원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이대근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외세와 민족의 대립이 아니라, 국가독점자본가 계급과 노동자·민중 간의 계급 모순이다. 따라서 혁명의 핵심 과제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멈추고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 논문의 핵심 차이점
박현채와 이대근의 논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였다. 둘 다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보았고, 둘 다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은 결정적으로 달랐다.
박현채는 '신식민지'라는 표현을 통해 외세 종속을 강조했다. 박현채에게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한국의 독점 자본(재벌)은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매판 자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 모순(외세 지배)이 계급 모순을 규정하는 더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이대근은 '신식민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과 계급 모순을 강조했다. 이대근에게 외세의 영향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은 국가 권력과 결합한 독점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계급 모순이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어의 차이가 아니었다. 주요 모순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혁명의 성격, 주체, 전략이 모두 달라졌다. 박현채의 입장을 따르면 '반미 민족 해방'이 우선 과제가 되고, 이대근의 입장을 따르면 '노동 해방'이 우선 과제가 되는 것이었다.
❚논쟁의 확산: 학계와 운동권으로
두 논문이 동시에 발표된 이후, 논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학계에서는 한완상, 김수행 등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참여했다.
한완상(1936-)은 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독특한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박현채와 유사하게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도,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결합했다. 한완상의 저서 《민중과 사회》(1980)와 《민중사회학》(1981)은 사회구성체 논쟁 이전에 이미 '민중'이라는 개념을 사회과학적으로 정립하고 있었다. 한완상은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분석하려 했으며, 박현채의 이론적 틀을 민중신학과 접목시키는 역할을 했다.
김수행(1942-2015)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한국에 정착시킨 학자였다. 그는 이대근과 유사한 입장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 발전과 계급 모순을 강조했다. 김수행은 『자본론』을 번역하고 해설하며, 자본주의 모순 분석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1980년대 초중반 학생들은 불법 복제본이나 일본어 중역본으로 『자본론』을 학습했고, 김수행의 정식 완역본은 1989년 비봉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운동권에서는 논쟁이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대학가의 서클들은 이 논문들을 교재로 삼아 집중적으로 학습했고,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논쟁의 핵심은 점차 명확해졌다.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 '민족 모순'(외세 지배)인가, '계급 모순'(자본주의적 착취)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면, 혁명의 성격도, 주체도, 전략도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1985년은 그렇게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의 '원년'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