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앞선 ‘망설임의 다리’
소설의 첫 줄에 등장하는 두 어절이다. 일상 속에서 겪는 ‘망설임’을 의미한다. 좀 더 의미를 부여하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망설임’은 ‘선택’으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리를 지나면, 갈래 길이 나온다. 한쪽은 유흥이 밀집된 곳이고 다른 한쪽 길은 일반적인–집으로 돌아가는-길이다. 그래서 망설임이 존재한다.
소설 속에서 ‘부유’는 쾌락과 밀접한 낱말이다. 그리고 전체 작품에서 ‘부유’는 쾌락의 종류가 여럿임–유흥, 섹스, 권력 등-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삶은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화가가 되기로 한 것도 그의 선택이었고, 첫 번째 스승을 떠나 다른 스승을 찾았던 것도 그의 선택이었다. 이어 쾌락을 즐기며 예술 작업에 전념하던 그가 스스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정치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도 선택이었다.
“한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를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과 권위가 틀림없이 있다. 어쨌든 신념에 차서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주인공 오노는 망설임 가운데 ‘선택’했다. 선택 과정에서 ‘망설임’이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았고, 실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망설임’은 ‘선택’과 다르다. 전자는 ‘이걸 해도 될까?’라는 의문을 그림자처럼 지고 다닌다. 그러고 나서 선택에 임한다. ‘선택’은 자기 확신이다. 실수조차도 ‘신념이었다’라는 감상에 빠져 너그럽게 이해될 수 있다. 그게 숨을 붙어있게 하는 원인이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판단했다고 해서 오류가 없지 않다. 그러나 오류일지라도 자기 확신의 덮개를 씌우면 잘못을 간파하기 힘든 법이다.
◇부유(floating)하는 세상
‘부유하는 세상’. 왠지 몽환적이다. 둥둥 떠가는 느낌이다. ‘뜬구름 잡는’듯한 모습이다.
퇴폐와 쾌락이 예술가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필자만의 편견일까? 프리섹스, 마약, 대마초 등을 떠올렸을 때 예술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부유하는 세상은 예술가의 세상이기도 하다.
“부유하는 세상–우리의 모든 그림에 배경이 되어 준 술과 여흥과 쾌락의 밤 세계–을 탐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다음으로 ‘부유하는 세상’은 사라지는 존재이다. 작가는 ‘사라짐’에 방점을 찍고 ‘밤’을 절정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빔은 아침이 오면 이슬처럼 사라진다. 작가가 밤과 아침을 어둠과 빛으로 상징하려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사라짐’을 언급함으로써 계속될 수 없음을 전달하려 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영속할 수 없음을.
“가장 좋은 것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말일세.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말일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이제, 주인공은 ‘부유하는 세상’을 떠나 양심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예술가들이 언제나 퇴폐적이고 폐쇄된 세상에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제 양심은, 선생님, 저에게 부유하는 세상의 예술가로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그 양심이 따르는 곳은 천황 이데올로기(신도이즘)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예술가는 단편적인 상황에 매몰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당한다. 그는 ‘부유하는 세상’의 밤의 쾌락을 버린 대신, 낮의–권력의– 쾌락 속에 빠진다. 술 취한 사람은 본인이 절대로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권력에 빠져 있었기에 스스로 그 속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그다지 의식한 적 없었으며, 지금도 이따금 어떤 행사에서나 누군가가 하는 말에서 내가 높은 신분임을 상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새삼스레 놀라곤 한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그는 부유하는 세상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새로운 부유하는–결국 사라질– 세상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에 대한 점입가경(漸入佳境)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것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한다. 이럴 때 스승의 기분은 어떨까? 한 편으로는 제자를 대견하다고 여기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심란한 기분일 것이다.
“한 예술가가 재능 있는 제자를 오랫동안 엄하게 훈련시켰을 경우, 그런 재능의 성숙을 배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기란 어렵다. 그래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스승은 제자의 성장과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주인공 오노의 스승이었던 모리도 제자의 성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의식주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고 추방한다. 이런 스승의 방식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주인공 역시 성공적인 독립 후 몰락하는 스승의 모습을 들으면서 그 앞에 당당히 서려 했으니 말이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복수다. 그러나 오노 역시 자신의 제자를 가혹하게 처리한다. 사람은 진보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역(逆) 진보할 수도 있다.
“당신네가 여기 오도록 정보를 준 사람이오. 이름은 마스지 오노. 화가이지 내무성 문화부 위원이오. 비애국적 활동 감시 위원회의 공식 고문이기도 하고. 내 생각엔 이 일에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 데.”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그의 제자는 당시 시국에 반하는 활동–작품 활동–을 했고, 오노는 그를 고발했던 것이다. 물론, 제자 구로다의 역경을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오노는 그의 스승보다 더한 처벌을 제자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부유하는 세상’은 믿었던 제자에 대한 스승의 애정이기도 하다. 자신을 이어 화풍을 발전시켜 주리라 믿었던 애제자의 이탈은 스승의 너그러움에 벽을 세운다. 아울러 영원할 수 없는 절정에 대한 덧없음이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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