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VS ‘신도이즘의 오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작이다.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전범으로 재판받는 과정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다. 기계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악’임을 판단하지 않고 실행했다면, 범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더라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큰 범죄에 빠져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작가(이시구로)는 분명히 한나 아렌트를 읽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중 전후-세계대전 후- 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꽤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아렌트에 대한 비판적 논고도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이후에 나온 비판은 아이히만의 ‘평범성’과 기계적으로 실행했다는 아렌트의 분석은 아이히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한 오류였다고 지적한다.
작가는 주인공 ‘오노’를 아렌트 비판 이후 ‘아이히만’과 유사하게 설정한 듯하다. 왜냐하면, 주인공 오노는 단순히 기계적으로만 신도이즘을 숭배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진실로 나아가는 길로 받아들였다.
“한 인간이 평범을 넘어서기를, 보통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은, 설사 실패하고 그 야망으로 인해 재산을 잃는다 해도 찬탄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누군가 다른 이들이 시도조차 못할 일을 시도했다면 비록 실패했다 해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어떤 위안–깊은 만족감이라고 해도 좋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단, 오노는 너무 순진했다. 그리고 무지(無知)했다. 정치를 몰랐고, 역사를 몰랐고, 이데올로기를 몰랐다. 결정적으로 그의 영향력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몰랐다. 그래서 유사한 과오(過誤)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결로 책임을 질 때, 그는 단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줄 타기하는 독자
한국 독자에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비판적으로 읽힐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이며, 이에 앞장섰던 사람은 전범으로 일컬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독자에게 고민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인간의 신념이다. 확신에 찬 신념–대의명분이 확실하다는–에 의한 행동이라면, 그래서 당사자가 본인에게 과오가 있었더라도 단순히 실수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 우리가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개인의 신념에 찬 행동에 비난의 세례만 퍼부을 수 있을까? 실제로 일본이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오노의 신념을 틀렸다고 비판한 사람이 일본 내에서 얼마나 될까?
도덕과 윤리는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과정에서 나쁜 의도가 아니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정상참작을 해준다.
다음은 무지(無知)다. 알지 못하고 행했다면 그것도 죄일까? 아렌트는 “평범한 악도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래된 고전 <성경>은 “알고 지은 죄가 더 크다”고 말한다. 작가는 어느 한 쪽에 손들지 않는다. 주인공의 예술가적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그 외의 지식과 세계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무지했음을 묘사한다. 주인공은 ‘신도이즘’을 예술로 표현하지만 전체주의나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제 ‘오노’ 개인을 일본이라고 생각해 보자. 전범국 일본의 현재 모습을 보면 완벽한 참회와는 거리가 멀다. 새로운 강국을 꿈꾸고 있으며 여전히 과거를 자책하거나 피해 입힌 국가에 용서 구하려 하지 않는다. 오노라는 개인을 국가로 상징하면 비판의 정도가 더 세질 수 있다.
“우리는 힘을 사용해 해외로 뻗어 나가야 하네. 지금은 일본이 세계 열강 가운데 적절한 자리를 점하기에 적당한 때라네. 내 말 믿게, 오노.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네. 다만 그럴 의지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왠지 지금 일본이 외치는 소리 같지 않은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동안에도 도쿄 올림픽을 하겠다고 억지 부린 아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평범을 넘어서 도약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결국, ‘코로나19’를 인정하고 도쿄 올림픽을 연기한 이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나라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이제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어 나갈 또 하나의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저 젊은이들이 잘 해내기만을 바랄 밖에.”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중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말에 감정 이입하지 말고 그대로 읽어보자. 당연한 말이다. 틀리지 않았다.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과거 세대의 잘못을 미래 세대가 책임지는 것도 옳지 않다. 하지만, 국가가 그랬다면? 특히 일본이 그랬다면?
개인과 국가를 구분하면, 위 문장의 해석이 달라진다. 국가의 구성원이 개인이면서 전쟁과 관련 없는 국민이라 할 때 일부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행태를 가지고 전체 일본을 비난하는 게 타당할까?
작가는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줄타기의 특성상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위험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작가는 긴장을 중요시한다.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음을 계속 전한다. “뭐가 맞아?”, “확실해?”라고 작가는 독자에게 계속 질문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려 하는 순간, 줄 위에서 묘기 부리는 광대가 작가가 아니라 독자임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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