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협의체는 있지만, 실제로 운영되는 모습은 거버넌스와 상관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자. 발전과 혁신을 위한 회의를 위해 모였지만, 실제로는 체제나 시스템 유지를 위한 결론을 내린다면, 그 회의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된다. 한국의 거버넌스는 현재 이름만 있는 셈이다. 출석부에 기재되어있으나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기대에서 실망으로
민관 거버넌스라는 말이 나오며 국가 주도에서 민간으로 그 권한이 이행할 거라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말로 거버먼트에서 거버넌스로 이행할 거로 생각했을까?
90년대 후반부터 시민단체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2009년에 나온 황덕순의 논문 <한국 비영리기관의 현황과 특징>을 보면, 1990년대 후반에 설립된 기관이 전 기간을 통틀어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세한 수치는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국가의 강력함 힘에 억눌렸던 시민들의 기지개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숫자가 많았다. 일단, 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시민 사회의 수준과 역량이 많다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당시 우리 사회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선거조차도 제대로 치른 경험조차 일천 했던 사회에 시민단체를 자유분방하게 세울 수 있는 인재와 자원이 충분했을까?
시민단체 수가 많아진 것과 관련해서는 시민 의식의 성장, 사회의 다양성, 개방성 등이 긍정적으로 향상했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단체가 많이 설립됐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 거버넌스는 채 준비도 되지 않은 시민 사회 풍토에서 등장했다.
다양한 구성원으로 조성된 거버넌스는 참석단체 수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와야 하고 수많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자유롭게 토론이 이뤄지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많은 이견이 나올 때 이를 조율하고 적절하게 의결할 수 방법이 존재했는가?
결론적으로 쉽지 않았다. 혹 이익(이권, 예산 등)을 얻을 수 있는 부분에서는 시민단체들의 다툼은 물론, 관에 대한 로비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니 ‘어용(御用)’단체라는 지적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버먼트는 거버넌스를 이용해서 정권, 정책 등의 당위성을 확보하면서 원하는 바를 비교적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거버넌스와 국가 산하 위원회의 차이점은 ‘타이틀’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내용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참여와 비판을 통해서 발전한다. 즉 시민 사회는 성장하고 성숙했다. 어쨌든 인간은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아닌가? 학습을 통해 긍정과 부정 양쪽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볼 때도 정부의 파트너로 시민이 등장했다는 자체가 괄목상대한 발전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국민, 시민, 주민이 가진 힘은 제한적이었다. 거버먼트에서 거버넌스로의 권력 이동은 요식적인 수준이었고, 행정 능력이나 실행 능력이 문제가 될 때마다 관료집단으로부터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회의는 있으나 나아가지 않는다.
“회의는 춤을 출 뿐, 나아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나폴레옹 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모인 빈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한 장군이 한 말이다. 유럽세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국가의 대표들이 모였으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주지하다시피, 빈회의의 결말은 구체제로의 회귀였다. 그리고 이러한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으로의 회귀는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무너진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변화의 흐름은 잠시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멈추게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거버넌스는 거버먼트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책임을 지는 협의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성요건을 살펴봐도 거버먼트 단독으로 관료 회의를 중심으로 결정했던 사항을 정부, 기업, 시민 등 다자간 주체가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거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하게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현실은, 회의는 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회의 이후 결정된 사항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나 책임이 없었다. 그러한 책임과 권한은 거버넌스에 있지 않고, 여전히 거버먼트에 있었다. 혹, 거버넌스에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라도 백지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아무리 여론이 좋지 않고, 야당이 반대해도 대통령은 장관을 마음대로 결정한다. 그럴 거면, 왜 여론을 묻고, 청문회를 하는가? 결론이 주최자(VIP)의 생각과 다르면 결정은 번복되거나 실행되지 못한다. 거버넌스가 거버먼트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그만큼의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회의만 있을 뿐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없다. 그저 회의장에서 현란하게 턴 하는 춤솜씨 대신 말솜씨가 허공에서 공기를 멋쩍게 가를 뿐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하면, 참석자들은 회의에 참석했다고 생각하지, 거버넌스에 참여했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저 앉아서 적당히 시간 때우고 수당을 받고 돌아가는 알바생 역할로 전환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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