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치히 3부작” 중 2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전편 《양철북》의 주인공이 난장이였다면, 이번에 등장하는 주인공 ‘말케’는 울대가 비대한 남자이다. 그리고 정상적이지 않은 육체만큼이나 태생과 가정환경도 평범하지 않았다.
말케는 외동이었다.
말케는 반고아였다.
말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전편 《양철북》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이지 않았던 시대를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의 시각으로 보거나, 그런 사람의 일대기를 통해서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상적이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정상이긴 쉽지 않을 듯하다.
말케는 울대가 큰 아이였다. 그의 울대가 얼마나 특이했던지, 어리숙한 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울대가 쥐라고 생각해서 달려들 정도였다. 말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고, 그러한 시도는 곧 다른 친구들에게 유행이 되기도 한다. 성적도 괜찮고 남성다움이 있어 말케를 추종하는 부류가 꽤 있었지만, 그의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와 가깝게 지내는 걸 꺼려한다.
어느 날 전쟁에서 무훈을 세운 군인이 강연을 오고, 그와 체육관에서 체육을 하던 중에 군인은 자신의 훈장을 잃어버린다. 훔쳐간 사람을 찾지는 못하지만, 말케가 솔직히 고백하고 그는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는다.
이후 말케는 다른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입대하고, 우연한 기회에 수훈을 세워 훈장을 받고 휴가를 나온다. 그는 휴가를 나와서 자신을 쫓아낸 학교를 찾아 연설을 통해 지난 과거의 잘못을 지우려 했지만, 교장 선생은 말케의 과거 사건을 고려해 그의 연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교장 선생을 폭행하고, 군에 복귀하지 않아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종종 친구들과 탐험했던 수장된 배에 한 번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고양이와 쥐”
고양이와 쥐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고양이는 쥐의 천적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쥐를 잡아먹는다. 그러나 고양이가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의 울대를 쥐로 착각한 고양이는 곧 사람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다. 역사 속에서 당시 실수한 고양이가 누구였을까? 국가로는 독일 등, 인물로는 히틀러 등이지 않았을까?
그들은 쥐라고 생각한 세계를 상대로 겁 없이 덤볐다. 당연히 쥐라고 생각했을 테니, 고양이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이런 무모하고 갑작스런 공격에 전 세계는 당황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가 전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병참이었다고 설명한다. 몇 개국의 도발은 세계를 상대로 한계가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작품 속 쥐가 아니었던 말케는 또 누구인가? 그 역시 실수한 고양이였다. 그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쫓겨난다. 다시 돌아와 과오를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 사람에게 찾아가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고 나서 귀대하지 않아 도망자 신세로 지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정상적이지 않았지만, 힘이 세고 공부도 잘했던 말케는 또 다른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처럼 전쟁 훈장을 통해서 영웅이 되고 싶었다. 과거의 과오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바람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말케를 히틀러로 비유한다면? 작품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일까?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진보’의 허상이 아니었을까?
‘진보(進步)’는 좋은 말이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니, 발전, 성장 등을 의미한다. 반대말은 ‘퇴보(退步)’다. 다른 말로 퇴보는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고 나쁨은 없다.
세계는 헤겔의 변증법처럼 ‘정반합’의 원리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쉽게 생각해서 20년 전과 현재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분명 앞으로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경제 분야는 그렇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 과거 세계 7위 내에 드는 경제국이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경제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 분야도 마찬가지다. 어느 해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였다가, 어느 해에는 그렇지 못하다. 모든 분야에서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정반합의 공식이 항상 통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말케를 보자. 그는 외모는 이상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남과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았다. 그러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작가는 진보 사상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발전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만 진보를 말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진보의 허무를 보여준다.
전쟁은 발전을 가져왔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전후 상황은 더 힘들었다. 개인의 삶은 어땠을까? 회복하지 못한 신뢰, 그리고 폭력으로 인해 최악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현실이 그렇다. 일가족의 동반 자살, 개인의 자살 등을 볼 때 어려운 상황을 겪고 나면 더 성장할 거라는 생각은 봄철 날리는 민들레 꽃가루처럼 가볍기만 하다. 어디로 날아갈지도 모른 채 바람에 따라 날리는 꽃가루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는 우연의 결과라고 단언하는 듯하다.
◆‘우리’, 그리고 ‘나’는 진보하고 있는가?
작가는 진보의 허상을 다뤘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진보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퇴보를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면, 종착역은 오직 죽음뿐이어서 그렇다. 우리 사회를 보자.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진보했을까? 경제적으로 분명 성장했다. 그러나 상대적 발탁감은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 물질적으로 충분해졌는데, 자살률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과거 대학원 강의 시간이 떠오른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역사적으로 가장 비참한 시기를 질문했다. 나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현재가 그런 시대라고 대답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질책이었다. 임진왜란, 6·25때 죽은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국가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던 전쟁 시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산술적인 숫자의 차이에 나는 수긍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은 과거의 인간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시절이 불행하면, 그만큼 비참한 시간이 어디 있을까? 과거 수백만 명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당장 내가 아는 지인이 죽으면 눈물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실수하는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울대에 달려들었던 고양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기 힘든 존재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의미를 두고 살기란 쉽지 않다. 휴전선으로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도 전쟁의 위협을 걱정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언제 국지전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말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쉼 없이 쏘아대도 내 주변에 떨어지지 않으면 무관한 일이 되고 만다. 오히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 게 더 아프고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국가는 역사를 챙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 의식이라는 게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은 역사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국가가 개인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판단해서 역사적 사건을 지우거나 왜곡하려고 할 때, 오히려 개인이 그런 국가에 역정을 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국가는 당황해 한다. 무관심할 줄 알았던 국민의 반응에 놀란 것이다.
이때, 국가는 고양이가 되고 국민이 쥐처럼 보이는 울대가 된다. 작가의 ‘고양이와 쥐’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바뀌는 상대적 지위에 불과하다. 그러니 ‘진보’가 명약관화하다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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