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박성관 대표는 고향 해남으로 돌아왔다. 광주광역시에서 조선대학교와 함께 나름 크게 운영하던 교육사업을 정리하고 귀농을 결심한 것이다.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려 갑상선암을 마주했고, 수술과 회복 후 새로운 삶을 고민하던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1987년부터 유기농업을 해오신 아버지의 길을 잇겠다는 결심이었다.
“광주에서 사업할 때도 한 달에 한 번은 내려와 꼬박꼬박 농사일을 도왔어요. 아버지가 하시는 유기농법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죠. 그래도 안전한 먹거리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으셨어요.”
오디 재배를 위해 조성된 비닐하우스에서 (사진: 윤준식)
■ 돌아온 땅, 유기농의 길을 이어가다
귀농한 첫해에는 참다래 농사에 전념했다. 매일 아침 다래나무를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인사를 하고,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다. 음악 감상이 취미라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농사에 최선을 다할까 궁리하다 음악이 식물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접하면서다. 음악 덕분인지, 노력 덕분인지 직접적인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의 정성은 처음부터 큰 결실을 맺었다. 평년 6톤에 불과하던 수확량이 13톤으로 늘었다.
하지만 성과가 큰 만큼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주변에서는 “아들이 오니 농사가 틀려졌다”는 말이 돌았고, 이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버지는 박성관 대표가 참다래 농사에서 손을 떼길 바라셨다. 참다래 농사를 멈추고 다음 해 고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400~500근을 수확하던 밭에서 천 근을 수확하는 일이 벌어지자 또다시 “그만 두라!”는 말씀이 돌아왔다.
귀농 첫해 도전한 참다래 농사는 성공적이었다. (출처: 명랑농원 홈페이지)
결국 박 대표는 독립을 결심했다. 농지 1,200평을 임대해 오디 농사를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하고 싶은 생각에서 독립한 것도 있지만, 마침 후계농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경영체 등록을 하려면 반드시 아버지 밑을 떠나야만 했다.
“제가 66년생이지만, 호적상 68년생이라 후계농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어요. 후계농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온라인 교육 100시간, 오프라인 교육 200시간을 이수했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전남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진행하는 교육도 받고, 전라남도 농업대학이 개설한 1년 과정도 밟았죠.”
처음에는 유기농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특히 오디는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었다. 일반 관행농으로 전환하려는 찰나, 어찌 알았는지 고등학교 선배 한분이 찾아왔다.
“후배! 아버님이 87년도부터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그 땅을 가꿔오셨는데, 자네가 거기다 농약을 치는 농법을 하겠다고?”
(출처: 명랑농원 홈페이지)
이 말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유기농의 길이 어렵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독립 후 두 번째 해에는 비가 잦아 균핵병이 창궐했다. 균핵병에 좋다는 유황을 뿌렸지만, 비가 올 때마다 씻겨 내려가기 일쑤였다. 방법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유황을 뿌리곤 했다.
민달팽이 문제도 심각했다. 배추를 심어놓고 다음 날 가보면 밭 외곽의 한 줄이 민달팽이에게 깔끔하게 먹혀 있곤 했다. 밤 10시쯤 손전등을 들고 밭에 가보면 이미 민달팽이와 공벌레들이 신나게 배추를 먹고 있었다. 밤새도록 민달팽이를 잡아내도 끝이 없었다.
그러다 대산농촌재단에서 진행하는 연구과제 신청 공고를 발견했다. ‘민달팽이 유인 트랩 개발’이라는 주제로 600만 원의 지원금을 신청했고, 다행히 연구과제가 선정되어 새로운 방제법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확한 오디를 안고 있는 명랑농원 박성관 대표 (출처: 명랑농원 홈페이지)
■농사는 과학이다
“농사는 항상 실전이지 연습이 아니더군요. 매년 날씨가 다르고, 그때그때 상황이 달라요. 과학적인 접근 없이는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죠.”
박 대표의 농사 철학은 명확했다. 유기농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자연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것. 그는 토양 관리부터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아버지의 경험부터 비추어 보았다. 유기농을 개척한 아버지는 퇴비와 천연 칼슘비료인 폐화석만으로 농사를 지으셨다. 하지만 그는 토양에도 다양한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람도 그러하듯 땅도 편식하게 해선 안 됩니다. 종합 영양제가 필요한 거죠. 칼슘, 마그네슘, 미량의 물질까지 골고루 공급해야 해요. 특히 작물별로 필요한 영양분이 달라요. 오디는 질소가 많이 필요하고, 고추는 칼륨이 중요하죠.”
병해충 관리도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성과인 된 민달팽이 트랩은 자금여력이 없는 농가 형편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버려지는 포장용 스티로폼 상자를 재활용해 상자 옆에 구멍을 뚫고 안에 유인제를 놓는 방식이다. 토양 오염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민달팽이 트랩은 버섯 농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예전에는 달팽이약을 뿌렸어요. 하지만 토양을 오염시키고, 비가 오면 씻겨내려가 약품 효과도 없어져요. 민달팽이 트랩은 비가 와도 문제없고,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죠. 사용해 본 버섯 농가의 경우 30% 정도 피해가 줄었다고 해요.”
결국 이런 노력들을 인정받아 귀농 8년차인 2022년에는 전남 유기농 명인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명랑농원 홈페이지)
■ 농부의 하루, 농부의 일 년
“농부는 수확물을 팔기 전까지 수입이 없어요. 월급쟁이처럼 매달 수입이 있어야 생활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월급 생활이 가능하도록 작물을 다양화했죠. 계절마다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봄에는 오디를 수확한다. 오디는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가 수확 시기다. 여름에는 고추를 따고, 가을에는 배추와 양배추를 심는다. 겨울에는 가공품 생산에 집중한다. 이렇게 계절별로 작물과 업무를 다양화하니 리스크도 분산되고, 수익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판로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일반 농산물과 달리 유기농은 가격이 높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았죠. 일반 관행농이 100근을 수확할 때 유기농으로 150근을 수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거든요. 높은 가격을 품질로 극복하는 전략이었죠.”
농지도 점차 늘려갔다. 처음 1,200평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임대 농지까지 합쳐 15,000평이 되었다. 그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주변 농가들이 “내 땅도 임대해서 농사를 더 해보지 않겠나?” 제안해 올 정도였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농장 한켠에 조성한 가공공장은 새로운 판로개척과 농산물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발판이지만, 농촌공동체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초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농촌마을 풍경을 보면 여전히 팔순 넘는 노인들이 들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종일 구부리고 일하는 것은 노인들에게는 중노동이고, 각종 근골격질환에 시달리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가공공장은 노인일자리 창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일자리를 창출은 귀농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노인들은 무리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대신 젊은이들에게 땅을 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성관 대표가 농업공동체를 꿈꾸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진: 윤준식)
■교육과 치유: 10년 후 명랑농원의 미래
“귀농 10년차가 되며 이제는 지역 농가들과의 협력을 꿈꾸고 있어요. 혼자만의 성공이 아닌, 함께하는 성공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농업의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죠. 귀농을 꿈꾸는 분들에게도 힘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 제가 운영하는 명랑농원은 단순한 농장이 아닙니다. 교육과 치유가 함께하는 미래형 농장으로 발전시키고 있어요.”
10년의 귀농 생활을 통해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라는 것, 기다림의 미학을 배운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박성관 대표지만 처음에는 체험농장 운영조차도 망설였다.
“내가 정성껏 키운 오디를 아무나 주물럭거린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지만, 막상 농약 없는 밭에서 마음껏 오디를 따고 즐거워하는 유치원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어요.”
치유농업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박성관 대표 (출처: 명랑농원 홈페이지)
계속해서 체험농장을 운영하며 치유농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방문객들로부터 “오디를 하나하나 따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이야기를 반복해 들으면서다. 논에서 부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벼의 소리, 갈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밭에서 캔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 모닥불을 피워놓고 바라보는 불멍도... 농촌 생활과 농사일이 현대인에게는 크나큰 치유를 주는 행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유기농 귀농 10년의 이야기를 듣고자 시작한 인터뷰는 벌써 3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박성관 대표는 앞으로의 10년을 바라보는 주제를 꺼냈다.
“대만 연수를 다녀온 후 안전한 먹거리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어요. 우리나라는 ‘GMO표시제’도 제대로 안 되어 있잖아요? 대만이나 중국에서도 GMO 표시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멀었어요. 소비자들의 알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야 하지만, 오래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가야 하고, 그러려면 함께 가야 한다. 이에 2025년부터는 건강한 농업과 건강한 먹거리를 함께 고민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계획이다. 오디가 열리는 계절에 다시 찾아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겠다 약속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디 재배를 위해 조성된 비닐하우스에서 (사진: 윤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