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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전(5)] 하이브리드전과 핵전력

새로운 전장-당신의 머릿속, 그리고 민주주의
제1부: 새로운 전쟁의 양상_05편

김형중 기자 승인 2023.08.02 23:57 | 최종 수정 2023.08.15 19:09 의견 0

러시아의 핵 독트린이 우크라이나 위기사태와 맞물려 재래식 군사력 위협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일이었다. 이전까지 서방은 러시아의 핵 전략의 의미를 구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핵 전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러시아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군사적 안보를 극대화시키는 입장에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재래식 군대와 핵 전력의 동시 사용을 공언하자, 핵무기가 경고용 ‘신호도구(signaling tools)’로, 재래식 전력이 지상에서 펼쳐지는 전장 상황변경에 각기 사용되는 상황이 서방의 인식 자체를 바꾸게 했다.

◆러시아 핵 전략의 두 가지 개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위기 상황에서 핵무기를 둘러싼 모호성-핵무기로 무엇을 달성하려는지, 어느 지점 또는 장소에 사용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모호성-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국가정책 전반에 발신되는 ‘핵 신호(nuclear signaling)’는 러시아의 강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두 가지 목표를 노리고 있던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는 미국에게 핵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유럽과 국제사회의 반응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오늘날 러시아 핵 전략의 키워드는 ‘확산완화(deescalation)’와 ‘확전우세(escalation dominance)’라는 두 가지 개념이다. 우선 ‘확산’이란 단어가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50년대로, 본래의 의도는 “왜 전쟁이 제한적인 상태로 머물 수 없는지?”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일단 대규모 군대가 충돌하기 시작하면 분쟁은 갈수록 관리가 어려운 상태로 악화된다. 혼란이나 오해 또는 패닉·열정이 갖가지 폭력적 행동을 자극한다. 명성, 신뢰, 자부심 등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되기 시작하면, 당초의 분쟁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던 수준을 넘어선 정도로 군사적 노력이 증가된다.

이런 문제는 대중적 여론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레토릭에 의하여 한층 악화된다. 만일 전쟁의 ‘문턱(threshold)’에서 멈추거나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모든 당사자들이 전쟁 노력을 축소(scale down)시켜야 한다. 결국 제한전은 타협을 함축한다. 하지만 적이 가장 악마적 용어로 묘사되고, 싸움에 걸려있는 이익이 생존을 좌우할 정도로 막대한 경우에는 타협이 매우 어려워진다.

◆확전우세와 선전선동의 결합이 보여주는 위험인식

‘확전우세’는 교전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상대에게 불리 또는 감당불가능 비용을 강요하며 갈등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반면, 다른 쪽은 확전 이외의 대안이 없거나 대안이 가용하더라도 이를 통해 현재 상황을 개선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똑같은 방식으로 적에게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확산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확전우세’는 교전 당사자 일방이 ‘확산 사다리 (escalation ladder)’에서 차지한 위치와 관련되는데, 다른 모든 조건들이 일정함을 전제로 한다면 확전우세를 확보한 측이 확산 사다리 내의 특정 지점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점유하고 있는 사다리 계단에서의 상대적 경쟁력, 갈등이 다음 계단으로 확산되는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할 지에 대한 판단, 그리고 각자가 갈등을 다른 계단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수단 등을 모두 망라한 일종의 ‘대차대조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확전우세에 중요한 변수는 각자가 분쟁 또는 충돌에 대하여 가지는 ‘상대적 두려움의 정도’이다. 갈등의 발발로 예상손실이 가장 적거나 갈등 발발에 대한 두려움의 정도가 가장 낮은 쪽이 확전우세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확전우세에 힘입어 러시아의 선전선동 노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의 선동은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위험인식(a sense of danger)을 고취시켜,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수도 있었을 서방측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선전 효과를 노린 레토릭에는 러시아의 핵 능력을 주기적으로 상기시키는 위협적 발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푸틴은 자국 군대를 우크라이나 국경지대로 이동시키면서, “러시아의 파트너들”에게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최상임을 이해해야 함”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러시아가 핵 강대국 중 하나라는 사실”도 환기시켰다.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러시아의 핵 전략

‘확산완화’와 ‘확전우세’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갈등이나 충돌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 위한 전제조건은 신뢰성의 확보이다. 군사적 위협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는 2000년부터 ‘제 한적 핵 타격 시뮬레이션을 포함하여’ 대규모 군사연습을 실시했다.

2008년 러시아 부총참모장 노고비친(Anatoliy Nogovitsyn)은 폴란드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를 배치하면 러시아의 핵 공격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선언하며, 핵무기를 군사적 시나리오에 포함시킬 것을 예고했다. 실제로 1년 후, ‘Zapad-99’ 명칭의 훈련에서 폴란드에 대한 핵 공격 시뮬레이션이 실시되었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의 핵무기가 갖던 역할과 위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냉전 종식 후, 핵무기는 군사적 용도의 ‘무기’가 아니라 국가적 위신의 상징, 예측불가한 미래에 대비한 보험, 안보관계에서 실용적 목적보다 상징적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적 도구’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걸프전과 코소보 분쟁, 유고 내전에서 미국이 보유한 재래식 군사력의 위력이 입증되면서 압도적이지만 사용할 수 없는 무기인 핵무기와 달리 압도적이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인 미국의 재래식 무기는 러시아에 핵무기를 이용한 대응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했다.

◆확산완화의 목표는 맞춤형 피해

1999년 제2차 체첸 침공을 앞두고 러시아는 자국의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재래식 군사적 능력을 보유한 미국이 코소보와 본질적으로 성격이 흡사한 체첸에서의 분쟁에도 러시아 국경 가까이에 개입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는 코소보 분쟁이 끝나기도 전에 러시아가 새로운 군사 독트린을 발표한 이유로 평가된다. 푸틴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러시아의 군사 독트린(Russia’s Military Doctrine)’에 사상 최초로 ‘핵무기 사용권리 유보(reserves the right to use nuclear weapons)’라는 문구와 함께, ‘확산완화’의 개념이 처음으로 명기되었다.

러시아가 제시한 ‘확산완화’ 개념은 다시 안보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확산완화’가 노리는 최종상태는 ‘맞춤형 피해(tailored damage)’이다. 이는 적대국으로 하여금 ‘현상 이전의 상태(the status quo ante)’로 되돌아가도록 강요하는 제한적 핵공격의 위협을 상정한다.

냉전기간의 억제에는 적에게 수용불가한(unacceptable) 피해를 입힌다는 위협이 포함되었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확산완화 전략은 대신 ‘맞춤형 피해’를 주는 것으로, 이는 “군사력 사용의 결과로 공격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초과하는 주관적으로 수용불가한 피해”로 정의된다. 그리고 맞춤형 피해의 위협이 갖는 유효성은 분쟁에 수반되는 비대칭적 이해관계를 상정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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