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로컬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작년 초여름 『로컬을 정의하다』라는 소책자를 펴내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꽤 많이 듣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자 노력하다보니 저의 행보를 눈 여겨 보시는 분들은 제가 상당한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으리라 높게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거기에 『로컬을 정의하다』란 책까지 펴냈으니 말이죠.
여기서 제가 『로컬을 정의하다』란 책을 펴내게 된 사연을 설명 드려야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로컬을 정의하다』란 매우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써낸 것은 제가 누구보다 로컬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로컬’이라는 말이 일상언어처럼 되어버렸는데, 이게 참 요상한 동음다의어라서입니다. 로컬판을 전전하는 로컬전문가들끼리 만나서 로컬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 말이 통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제3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말로는 서로 같은 로컬인데, 의미는 서로 다른 로컬
처음에는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인 ‘거시기’처럼 독립어,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 다양한 용법이 있구나 생각했지만 대화 내용을 곱씹을수록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로컬이란 말로 ‘리단길과 같이 새롭게 뜨는 힙한 공간이나 거리’를 표현하고, 누구는 읍·면·동보다 더 협소한 구역의 단위로 로컬이라 합니다. 외국생활을 하다 온 사람의 경우 현지인을 로컬이라 부르고, 심한 경우 지방에서 발견한 ‘서울풍 점포’를 로컬이라 하기도 하지요.
무지몽매한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도시를 무대로 오랫동안 힘써왔다는 학자, 연구자, 정책입안자, 활동가라면 로컬에 대한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소통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런 컨센서스가 없다면 저마다의 ‘조작적 정의’라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했습니다. 적어도 ‘나의 로컬’과 ‘너의 로컬’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는 알아야 제대로 된 컨센서스를 이룰 것 아닙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매우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로컬’이란 단어가 순수한 우리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동음다의어로 사용되며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을 세종대왕께서 보셨다면, 다시 한 번 “문자와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담론을 주도하는 리더도 로컬을 정의하지 않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같은 무명소졸이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풍자와 해학을 담아 로컬 담론을 풍성하게 하고자 숙고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로컬을 정의하다』란 작은 책을 독립출판의 형태로 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껏 교보문고에서의 판매 수준, 여기에 홍보와 프로모션이 전무하다보니 이 책의 보급량은 미미하여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만, 가끔씩 로컬의 정의를 시도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탠 것 같아 소소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봐주기 힘든 상황을 목도하곤 합니다. 자타공인하는 로컬 전문가들이 저서나 강의, 외부기고 등에서 로컬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여러 차례 ‘로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이 ‘로컬’을 언급될 때마다 각각의 의미가 서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본인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들 개인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피니언을 리드하는 전문가들이 그렇게 소통하니, 로컬 담론에 편입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도 똑같이 행동한다는 겁니다. 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니다. 어쩌면 ‘로컬이라는 거시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 안에만 존재하는 특수공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컬은 산업의 현장-먹고 사는 곳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소신 있게 꺼낼 수 있는 이유는 제가 관심 갖는 주제가 ‘로컬’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관심갖는 주제는 소시민, 좀 더 자세하게는 도시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어쩌다보니 창업전사들의 대열에 합류해 어줍잖게 벤처창업과 소상공인창업의 경험을 거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시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양질의 일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들은 대기업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전체 기업 중 얼마에 해당할까요? 마침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2021년 기준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기본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99.9%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며, 기업의 수는 총 7,713,895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를 역산하면 대기업은 0.1%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이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는 될 줄 알았는데 0.1%라니요? 물론 일자리 개수를 조사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의외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숫자가 크다는 사실은 고민의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을 탓하며 주저앉을 수는 없지요. 대기업까지는 어렵다 하더라도 중견기업의 숫자라도 늘릴 수 있다면 양질의 일자리는 더욱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상공인이 성장하며 일자리를 좀 더 창출해 중소기업이 되고, 중소기업도 성장해 중견기업이 되면 해결됩니다. 산업의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겠죠.
◆먹고 살려다가 맞닥뜨리는 임대료 문제
이런 생각을 하며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듣고 알리겠다는 취지에서 창업자들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로컬 담론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창업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빈번하게 나누게 되는 몇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임대료와 권리금 문제는 항상 등장하는 꺼리입니다. 창업자 대부분은 괜찮은 상권에 저렴한 임대료로 들어가 점포를 활성화시켜 비싼 권리금을 받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근데 이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선 괜찮은 상권은 임대료가 저렴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임대료가 저렴해서 들어가 보면 죽은 상권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권리금 없는 가게는 임대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을까요?
또 하나, 점포를 활성화하면 권리금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엑시트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상권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면 건물주가 먼저 임대료를 올립니다. 엑시트하기 전에 건물주가 올린 임대료 내다 망할 판국입니다.
◆‘걷고 싶은 거리’가 가져올 수 있는 악순환
여기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의 어원은 영국의 신흥상류층을 지칭하는 ‘젠트리(gentry)’와 접미사 ‘-fication’이 붙어 “지역이 개발되어 고급스런 주택과 문화시설이 들어섰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었다고 합니다.
‘젠트리’는 16세기 영국에서 양모산업이 발전하며 등장해 산업혁명 시기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신흥 자본가 세력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귀족이 아닌 평민출신의 상인들이었지만, 부를 축적함에 따라 귀족에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신흥 자본가들이 저택을 소유하게 되고 저택 인근에 자신들을 위한 문화시설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상상해 보면 어떤 상상을 하게 되나요? 원래 젠트리피케이션은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걷고 싶은 거리’ 때문에 발생합니다. 걷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모여들고, 이에 따른 부가가치가 높아지자 이에 비례해 개발이 이어지고, 걷고 싶은 사람들이 더 모여들고... 땅과 건물의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만큼 지가와 임대료가 거듭 상승하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겁니다.
우선 걷고 싶은 거리를 찾아오는 유동인구에 비해 점포의 수가 부족하다보니 점포 임대료가 상승합니다. 이에 따라 임대수익을 욕심내는 건물주들이 소유한 주택을 점포로 전환시켜 나갑니다.
◆한 번 시작된 ‘둥지 내몰림’은 제어하기 어렵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주거공간이 줄어드니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당연히 주택 임대료는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도시서민층이 다른 주거지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점부터 본격적인 ‘둥지 내몰림’이 시작됩니다.
한편 상업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지역은 상업화의 극한을 향해 달려갑니다. ‘걷고 싶은 거리’에 찾아온 유동인구가 늘어날수록 건물주는 임대료를 올립니다. 임대료가 올라도 임대를 원하는 상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둥지내몰림’의 속도가 붙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한편 점포개설을 위한 투자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입주한 상인들은 고객의 체류시간을 늘리고 객단가를 높이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이때부터 악순환의 사이클은 점점 짧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정점을 넘어서면 상권이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제공받는 상품과 서비스가 품질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게 느껴지는 순간, 지금까지의 유동인구는 또 다른 ‘걷고 싶은 거리’로 옮겨 가는 겁니다. 괜히 ‘유동인구’라 이름 붙이는 게 아닌 거죠.
특히 경제위기, 외교분쟁으로 인한 관광객 급감, 팬데믹 등 외부적인 타격에 의해 경기가 침체되면 지금까지 끌어올렸던 ‘걷고 싶은 거리’는 순식간에 붕괴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정주인구가 사라졌기 때문에 빠져나간 유동인구로 인한 손실을 막아줄 소비층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건물주고 세입자고, 주민이고 상인이고 할 수 없이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도시의 한 귀퉁이는 이런 흐름으로 몰락과 공동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젠트리피케이션은 가능할까?
저는 이 지점에 도시서민의 먹고 사는 문제가 놓여 있다고 보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걷고 싶은 거리’의 형성은 일자리 문제와 문화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어 주지만, 그 도가 지나쳐 ‘둥지내몰림’이 벌어져 도시서민들이 주거지와 일터를 잃고 유리방황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얼핏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논리적인 오류를 갖고 있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로컬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나 할까요? 도시재생, 재개발, 재건축 등등으로 대한민국 전역이 고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분명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저의 로컬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앞으로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로컬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로컬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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