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한 넓고 얇은 내용이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어느새 74번째 맞는 6.25전쟁일을 맞이했습니다. 어르신들과 6.25 시절 이야기를 하다보면 피난 갔다온 이야기, 피난민의 애환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 덕분에 확산된 음식이 있는데요. 오늘은 냉면의 고현학입니다.
1. 냉면, 언제부터 먹었을까?
냉면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메밀은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흔한 재료였고, 산지가 많은 서북지역과 강원도 이북 지역에서 주로 발달했습니다. 1670년에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보면, 얼음을 띄운 오미자 단물에 녹두로 만든 면을 말아먹는 별식 ‘탁면’이 소개되는데, 이게 오늘날의 냉면과 비슷합니다.
조선 후기 나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라는 책에도 겨울철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메밀국수에 무,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은 것을 ‘냉면’이라고 설명했는데요, 현대식 냉면과 가장 흡사한 방식의 냉면입니다.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채소,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를 썬 것을 기름과 간장, 국수에 섞어 비빈 것을 ‘골동면(骨董麪)’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앞에서 이야기한 냉면이 요즘의 ‘물냉면(평양냉면)’, 골동면이 지금의 ‘비빔냉면(함흥냉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관서 지방의 냉면, 그중 평양냉면의 맛이 가히 일품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도 동치미 국물에 배, 잣과 편육을 얹은 냉면을 즐겨 드셨다는데 평소 맵거나 짠 음식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냉면이 겨울 별미? 여름 별미 아닌가요?
더워지기 시작하는 5월부터 8월까지가 냉면 매출 80%가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냉면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인데요, 지금은 여름철에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주는 여름 음식의 대표로 자리 잡았지만, 원래는 추운 겨울철 음식입니다.
추운 겨울에 뜨거운 온돌방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동치미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맛이 진짜 냉면 맛이라고 합니다. 이건 냉면 국수의 원료인 메밀이 자라는 시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보통 음력 7월 초순에 심어 늦가을에 수확했는데, 평안도 사람들이 늦가을에 추수한 메밀로 냉면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겨울의 제철 음식이 냉면이었던 거죠.
지금은 냉면에 살얼음을 동동 띄워서 먹는 게 일반적이지만, 원래 평안도식 냉면은 국물이 얼면 맛이 변한다고 하여 국물이 얼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냉면도 얼음이 전혀 없는 물냉면이죠. 이게 남쪽으로 전래되어 서울식 물냉면이 정착하며 얼음을 띄워 아주 차갑게 먹는 냉면의 새로운 전통을 만든 겁니다.
3. 평양냉면, 함흥냉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육수에 말아 먹으면 평양냉면, 양념에 비벼 먹으면 함흥냉면이라고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요, 사실 두 냉면의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습니다.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듭니다.
메밀면은 면이 거칠고 굵은 데다 끈기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밀가루나 전분을 섞어 뜨거운 물로 반죽한 다음 치대야 합니다. 메밀과 밀가루, 전분의 비율, 반죽하는 기술에 따라 면의 끈기와 질감이 달라집니다. 전분을 이용하여 만든 면은 상대적으로 질긴 편이어서 면을 가위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4. 평양냉면은 밍밍한데...
1911년 평양면옥상조합(平壤麵屋商組合)이 생길 정도로 평안도는 냉면의 고향입니다.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에 눌러 만든 실국수인데요, 평양냉면이 맛있기로 유명한 것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양냉면은 주로 동치미 국물을 사용하였는데 동치미 국물은 시원하고 감칠맛이 있어 국수물로 아주 적합하였습니다. 평양냉면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었다고 하니 의아하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맛의 평양냉면은 6.25 전쟁 이후 북한에서 온 실향민들이 서울에 냉면집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서울에서는 냉면을 여름에 즐기는 별미 음식으로 여겨졌는데, 당시 냉장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울의 무더운 여름 날씨는 동치미 맛의 균일도나 신선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동치미 육수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 등을 이용한 고기 육수로만 대체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냉면’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평양냉면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담백해도 너무 담백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육수에 당황하게 되는데요. 심심하고 밍밍한 맛에 향이나 감칠맛을 찾아야 하는 고난도 미식을 하게 만드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양냉면이 무조건 밍밍한 맛은 아니었습니다. 북한식 평양냉면은 고명도 맛도 풍성하다고 합니다. 국수사리 위에 배, 김치,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이, 삶은 계란 순서로 고명을 놓습니다. 국수물을 1/3쯤 채우고 참기름을 두르고 잣을 띄운 후, 양념장과 식초, 겨자를 따로 곁들여 낸다고 하네요.
5. 그럼 함흥냉면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습니다. 현재의 함흥냉면은 일제강점기 때 함경도 사람들이 즐기던 농마국수에서 유래했습니다. 농마는 녹말의 북한 사투리인데요, 녹말의 재료인 감자는 함경도의 대표적인 식재료입니다. 개마고원에서 생산된 감자를 가공한 감자녹말을 이용한 국수가 발달했는데, 물냉면 형태인 농마국수만 먹었던 게 아니라 함흥 바다에서 잡은 생선의 회와 매운 양념을 넣고 비빈 회국수가 탄생했습니다. 즉 함경도 회국수는 원래부터 있었지만, 함흥냉면이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함경도 지방의 회국수가 6.25 전쟁 후 남한으로 내려온 실향민에 의해 전해지는데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가게 간판에 ‘함흥’이라는 지명이 많이 들어갔고, 회국수가 냉면이라는 메뉴 이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에는 감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감자 전분 대신 고구마 전분을 사용한 국수를 만들게 되었고, 함흥에서 잘 잡혔던 홍어나 가오리 대신 가자미회와 명태살 무침을 사용하게 되면서 현재의 함흥냉면이 등장하게 된 거죠.
6. 부산 밀면도 피난민들의 음식이라면서?
부산 밀면의 뿌리도 함흥냉면, 농마국수로 6.25 전쟁기에 탄생한 음식입니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국수 가게를 하던 분들이 부산에 피난 와 개발한 음식인데요, 전쟁 때문에 식재료가 귀했고 당시 미군의 원조로 밀가루가 값싸게 풀려있어 밀가루와 전분을 섞어 만든 것이 밀면입니다.
초기에는 경상도 냉면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밀면은 메밀면처럼 툭툭 끊어지지도 않고, 전분면처럼 질기지도 않으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갖고 있습니다. 또 경상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양념이 많이 들어가, 맵고 달고 짠 자극적인 맛이 특징입니다. 육수에 돼지고기를 쓰기 때문에 누린내를 잡기 위해 넣은 한약재 향이 함께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명도 계란, 오이, 무김치를 쓰고 소고기 편육 대신 돼지고기 수육을 쓰기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는 돼지국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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