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_이야기(49)] 미아리에서 청송회는 권력이었다
이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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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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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청송회는 일회성 계 모임이었다. 미아리에 자리 잡은 나름대로 지역 유지라고 자부하는 몇몇 분들이제주도에 관광이나 한번 가자고 만든 여행 계모임이다.청송회가 만들어진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의 일이니 당시엔 제주도에 비행기 타고 관광을 가는 건요즘 외국 여행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 동네 터줏대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석희씨를 중심으로 모인 청송회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해체가 되지 않았다.왜냐하면 각종 선거가 있을 때마다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미아 삼거리 지역에선 가장 영향력 있는모임으로 비춰져서 쏠쏠한 재미를 느낀 이석희씨가 이 모임의 해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도 청송회의 창단 멤버다.동네 목욕탕사장, 새마을금고이사장, 산악회장을 맞고 있는 전직 교장선생, 육사교수 출신이라는 분 등나름대로 한때 힘 좀 쓰셨던 분들이 멤버이다 보니 선거 입후보자들은 이 모임을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다.
청송회는 한 달에 두 번 꼴로 모임이 있다.한번은 정기 모임으로 주로 맛 집을 찾아 다니는 날이고 또 한번은 여행을 가는 날이다.당일 치기 여행도 있지만 며칠씩 떠나는 여행이 대부분이다.멤버들의 회비도 있지만 동네 정치인들이나 그 쪽 관계자들이 스폰서를 해준다.물론 예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런 거 꿈도 못 꾸는 시대가 됐으니 말이다.미아리 주민의 상당수가 전라도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인데 청송회 주축이 전라도 세력들이다.경찰서나 구청에서 위촉 받는 감투 등은 청송회가 독식을 한다.미아리에 살다가 멀리 안양이나 의정부, 산본 등 타 지역으로 이사한 사람들도 청송회를탈퇴하지 않고 모임 때마다 찾아온다.
아무튼 청송회에서 관리하는 돈의 액수가 만만치 않다 보니 멤버간에 갈등도 많다. 한번은 속초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말썽이 생겼나 보다.
미아삼거리에 몇 채 남지 않은 구식한옥, 이 골목도 곧 재개발이 된다. 사람들도 미아삼거리를 떠나간다. 추억만 남는다
(사진 : 이정환)
“이석희씨 때문에 이번 여행은 완전히 잡쳤어. 그 양반 뭔 고집이 그리도 센지. 그게 음식이야”아버지께서 포문을 여신다.
“아니 그 비싼 돈을 주고 그걸 회라고 내와”어머니께서 맞장구를 치신다.
“왜요 제가 알려준 그 집에 안 가셨어요” 내가 끼어들었다.
“말도 마라. 이석희씨가 고집을 부려 자기 후배네 횟집에 가면 잘 해줄 거라고 해서 갔는데 싸움만 대판 하고 왔다.”
당시에 나는 한국일보 객원기자였는데 주로 문화관련 기사나 맛집칼럼을 기고했다.나는 전국적으로 값싸고 맛있는 음식점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마침 이번 청송회 여행지가 속초라기에예전에 기사로 올렸던 <청간리 활어 회 센터>를 부모님께 소개해드렸다.
그리고 일부러 회 센터 사장님께 전화까지 걸어서 우리 부모님이 가시니 특별히 잘 해드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런데 이석희씨가 부득불 고집을 부려 속초에 있는 친구네 횟집에 갔다는 거다.그런데 이석호씨가 소개한 횟집의 음식가격이 너무 터무니 없이 비쌌고 음식 맛과 양이 형편이 없어서 아버지는 차마 이석희씨와는 싸우질 못하고 그 횟집 사장과 한바탕 했나 보다.결국 청송회 멤버들이 음식 값의 반만 부담하고 이석희씨가 나머질 계산했는데이번 일로 이석희씨가 마음이 많이 상했던지 청송회를 탈퇴한다고 아버지께 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청송회를 만들자고 발의했던 초대회장 이석희씨가 청송회를 처음으로 탈퇴하는 회원이 된 것이다. 미아리삼거리 청송회는 적어도 미아리의 한 귀퉁이 지역사회에서는 그 힘도 막강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모임이다.
이석희 씨가 돌아가신 이후로 미아삼거리 최고참은 아버지다.아버지 다음으로 최고참은 나다. 나는 55년째 미아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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