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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41)] 서독, 할슈타인 원칙을 사실상 포기하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6.27 00:24 | 최종 수정 2019.07.03 16:58 의견 0

케네디 대통령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이 점차 긴장완화와 군비통제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서 독일문제와 안보문제를 분리하여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독일정책에서 독일조약 7조에 따른 의무를 더 이상 우선순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서독에게는 긴장완화 압박으로 나타났다.

이런 국제 환경의 변화 아래서 이제 아데나워 서독 정부의 ‘힘의 우위 정책’도 점차 그 현실성이 도전받게 되었다. 한 예가 1960년 9월 이산가족단체가 조직한 ‘고향의 날’을 이유로 동독이 지구간 통행로를 폐쇄하자 아데나워 총리는 에어하르트 경제장관의 뜻을 누르고 동서독 간 교역에 관한 베를린 협정을 1961년 1월 1일부로 폐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압박으로 2주일 후에 이 조치를 취소하여 그의 이미지만 손상하고 말았다.

이런 사정을 인식한 아데나워 총리도 재임 마지막 해에는 재통일 목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동맹국에게 무기통제 합의를 위해 움직일 여지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재통일과 군축 간의 연계를 수정할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였다. 소련에는 비밀로 하였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던 1958~1962년 사이에 그가 제시하였던 ‘독일정책’은 과도기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전제란, 1962년 연방의회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동독 주민의 더 많은 자유라는 의미에서 “인간적 고려와 고통 완화를 위하여 민족 과제 즉 통일 문제는 일정기간 연기한다”는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1962년 그는 동서독 교역 위탁기관을 통하여 서독의 신용보증을 대가로 예를 들면 베를린 통행협정을 비롯한 독일의 긴장완화와 인간적 고통 경감을 위한 회담 가능성에 대한 동독 지도부의 의중을 모색하였다.

또한 아데나워 정부의 대외정책 원칙인 할슈타인 원칙이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서독 정부의 정책을 점차 제약하게 되었다. 1957년에 동독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대사관을 개설하였지만, 서독은 이집트에서 대사관을 철수하지 않았다. 더욱이 1965년 서독이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많은 아랍 국가가 서독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였지만 동독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6일 전쟁에서 동독이 아랍 국가를 지지하자 아랍 국가들이 동독을 승인하였다. 1969년에도 캄보디아가 동독을 승인하였지만 서독은 캄보디아와의 관계에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1967년 서독이 루마니아와 외교관계를 맺고 이듬해에 유고슬라비아와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1957년에는 유고슬라비아가 루마니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하여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했었다. 외교관계 복원에 대하여 서독은 “공산국가의 동독 승인은 소련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이를 이유로 제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서독 스스로가 할슈타인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셈이다.

내부적으로도 아데나워 정부 1, 2기 정부의 연립 파트너였던 자민당은 당초 서방을 향한 신뢰조성 정책을 지지하였다. 1956년 연정 배제 후에 자민당 내에는 정부의 정책에서 벗어나서 독일문제에서 양보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정책 특히 안보정책 협의를 위하여 소련과 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증가하였다.

많은 자민당 정치인들의 의견에 따르면 통일의 열쇠는 소련에 있었다. 동시에 자민당은 새로운 안보정책 모델(4강국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많은 참여 국가가 망라된 안보조약 모델)에 의해 종래의 서방 정책도 논의해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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