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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올해로 데뷔 21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배우 유상재

글렌다 박 기자 승인 2020.01.14 10:15 | 최종 수정 2020.01.15 08:46 의견 9

특정 직업에서 20년을 수련하면 ‘장인’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지난 20년간 예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한 남자가 있다. 파릇파릇한 20대 초반에 그는 미술학도였고, 록밴드 보컬로 가수였고,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은 배우이다. 2020년으로 연예계 데뷔 21주년을 맞은 배우 유상재와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배우 유상재

작년 한 해에만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여덟 편에서 열연을 펼쳤다. 그 어느 때보다 바빴던 한 해를 보냈을 것 같다. 바쁜 만큼 기쁜 것도 없고 축복도 없다. 어디선가 그 누군가는 그 바쁜 시간을 간절히 원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올해로 벌써 데뷔 21주년이다, 회한이 남다를 것 같다.

데뷔 21주년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한 것 같다. 사실 데뷔라는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건지 좀 모호하다. <이븐플로우> 라는 록밴드의 보컬로 참여했던 <소요록페스티벌 2000> 공연을 데뷔 기준으로 삼는다면 21주년이 맞다.

<소요록페스티벌 2000>은 ‘한국의 우드스탁’을 표방한 대형 록 페스티벌 무대였다. SBS 방송 주관으로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언더그라운드 인디밴드들과 오버그라운드 밴드들, 해외 각국의 록밴드들 등 국내외 록 뮤지션들을 소요산 특설무대라는 한자리에 모았다. 2000년도의 그 무대가 세상에 얼굴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데뷔 무대다.

이후 <수시아블루>라는 록밴드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고 홍익대학교에 진학해 미술 공부를 다시 하기도 했다. 결국, 먼 길을 돌아 오래된 꿈이었던 배우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16년 차다. 세월 참 빠르다 싶다. 내가 벌써 40대 중반이 되었다는 게 실감 안 날 때가 많다.

오랫동안 배우의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운 좋게도 많은 좋은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다. 작품이 크든 작든, 역할이 크든 작든, 내게 맡은 배역들에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내 필모그래피에 차곡차곡 쌓인 그 한 작품 한 작품들이 내가 배우로서 꾸준히 성장하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들이 내겐 늘 감사하고 소중하다.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인 것 같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유명배우는 아니지만 넉넉하진 않아도 연기를 해서 받는 출연료로 생활하고 있다. 배우가 직업이 된 것이다.

모든 배우 지망생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도 소소한 것 같지만, 결코 이루기는 쉽지 않은 소망, ‘연기해서 번 돈으로 먹고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라는 작은 바람과 목표를 가슴에 품고 건설현장의 막노동부터 시작해서 셀 수도 없는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들을 병행하면서 배우 생활을 버티고 또 버텨왔다.

그때는 정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연기만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연기해서 번 돈으로 먹고살 수만 있으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연극 무대와 영화, 드라마 촬영장을 오가며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 십 년쯤 되어 갈 무렵부터 빠듯하지만, 출연료로 받은 돈으로 생활이 되기 시작하더라.

십여 년 전,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연말에 지금의 아내인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올 한해 내 연봉이 200만 원이 안 되네. 그 돈 가지고 일 년을 어떻게 산 거지?” 이 말에 여자 친구가 적잖게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다. 아무것도 안 사고, 안 먹고, 그냥 숨만 쉬어도 다달이 몇십만 원이 집세와 생활비로 통장에서 줄줄이 빠져나가는데 그때는 대체 어떻게 그 수입으로 일 년을 버텼던 건지 모르겠다. 요즘은 고민 없이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곤 계산대에서 거리낌 없이 500원짜리 종량제 봉투를 달라고 주문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실눈을 뜨고서 그날의 대화를 회상하며 농담을 건네곤 한다.

‘비닐봉툿값 50원도 아깝다고 벌벌 떨던, 마트 계산대에서 비닐봉지 하나 달라고 했다고, 씀씀이가 헤프다고 면박을 주던 사람 어디 갔느냐고. 그 50원 아끼겠다고 매번 라면 상자에 바리바리 물건들 구겨 담아서 힘들게 들고 다니는 거 보고 돈이 있어도 써야 할 때 쓸 줄 모르는 좀팽이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런 좀팽이는 아닌 거 같아서 참 다행이라고.’ (웃음)

그땐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수입이 적으니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지출을 줄이면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리 여유가 있거나 넉넉한 형편은 못되지만 힘들었던 그때를 떠올려보면, 함께 가정을 꾸려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안정감 있는 삶이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2001년 전남대학교 재학 시절 그룹 전시를 준비하던 동료들과

경력이 예사롭지 않다. 전남대 미술학과 졸업, 홍익대 회화과 입학과 중퇴, 전공을 살린 미술계 진출이 아닌 록밴드 보컬로 활동하다가 2007년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자로 변신했다. 그 과정들이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난 조용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말수도 적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학교에서도 그리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좋아했고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덕분에 자연과 동물들을 사랑하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그 시절 아이들도 한두 개쯤은 다니던 그 흔한 주산학원, 웅변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태권도장, 등 학원이라고 하는 데는 단 하나도 다녀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틀어 내가 다녀 본 학원은 고등학교 때 미대 진학을 결심하고 다닌 미술학원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림을 곧잘 그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 성적은 항상 최고점이었다.

중학교 진학 이후에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미술 선생님을 따라 미술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해보기도 했고 만화에 푹 빠져 만화잡지를 달고 살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수업 시간에 연습장에 몰래 그린 내 만화를 반 친구들이 서로서로 돌려 보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중학교 3학년 무렵이 내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설계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 성적에 따라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서열화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위 명문고라 불리는 학교에 진학해 우등생들과 경쟁할지, 멀리 대학 입시를 바라보고 내신성적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학교에 진학할지를 고민하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고, 나의 결정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관한 한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셨고 내 결정을 존중해주셨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해 반 배정을 받자 담임선생님에 의해 진로 결정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어떤 의미로 세상에 존재할 것인가…?’ 그 당시의 나는 좋아하는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만화가, 음악가, 작가, 철학가, 화가, 그리고, 배우. 그중에서 가장 되고 싶었던 건 배우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텔레비전 프로그램 <명화극장>을 통해 봤던 올리버 스톤 감독 영화 <도어스>라는 작품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록밴드 <도어스> 보컬리스트인 ‘짐 모리슨’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짐 모리슨이 환생해 돌아온 듯한 발 킬머의 연기를 보고 ‘배우’의 꿈과 <도어스>의 사이키델릭한 음악에 매료되어 ‘뮤지션’이라는 꿈이 동시에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방의 소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연기과 진학에 대한 정보도, 연기를 배울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을 전공으로 살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이후 연기와 관련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입학성적이 좋았던 나는 공부나 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뜻밖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부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2학년에 진급하고 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미술부 활동을 허락받은 나는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나보다 빨리 시작한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렇게 학원에 다닌 지 1년 만에 나보다 최소 1년 이상 시작이 빨랐던 친구들을 따라잡아 입시생 중 상위권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그 무렵,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담임선생님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 남아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라며 미술학원을 못 가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통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곧 법이던 시절이었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 그 시기에 미술학원을 다니지 못한 난 결국 미대 입시 실기시험을 망쳤고 인 서울에 실패했다. 덕분에 난 먼 길을 돌고 돌아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배우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인생이 크게 달라진다.

그렇게 실패를 맛보고 1995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내가 계획했던 꿈들이 좌절되어 ‘실패’라는 단어를 썼을 뿐 전남대학교라고 하는 학교 자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점이자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국공립의 명문대이다.

하지만 학과는 다른 문제였다. 전임교수들의 불성실한 수업 진행과 학생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나를 힘들게 했다. 재수를 고민하던 나는 형과 상의를 했고 충고를 받아들여 한 학기만 버텨보기로 했다. 결국, 학과 생활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동아리 활동으로 눈을 돌려 <하이코드>라고 하는 통기타동아리에 가입해, 한 학기 동안 활동을 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고 사람들과 정이 들어 재수하려던 마음은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재수를 하려던 생각을 접고 학교를 계속 다녔고 그러다가 <맥킨토쉬>라는 록밴드 동아리에 보컬로 들어가서 활동을 했다.

20살, 그때부터 록밴드 보컬로 활동하기 시작한 나는 음악에 미쳐서 살았다. 딥 퍼플, 레드 제플린, 오지 오즈번, 메탈리카, 판테라, 스키드로우, 드림씨어터, 너바나, 라디오헤드 등 록 음악의 계보를 잇는 다양한 명곡들을 카피해 학내외에서 공연을 펼치다가 2년간 쌓인 20곡의 레퍼토리를 연주한 <맥킨토쉬 20기 정기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하고 군대를 다녀왔다.

가끔 내 학력에 관해 물어보는 이에게 나는 그런 농담을 하곤 한다. 전남대 미술학과, 해병대 상륙보병과, 홍익대 회화과. 이렇게 대학을 세 개나 다닌 사람이라고. 어릴 때부터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험난할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던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해병대에서의 군 생활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힘든 군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다시 사회에 나가면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마음 하나였다. 병장 만기전역을 하기까지, 그 안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만 지금도 가끔 해병대에 다시 입대하는 끔찍한 악몽을 꾸곤 한다.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다시 복귀한 나는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함께할 동료들을 찾기 시작했고 우연히 들른 라이브클럽에서 보컬 구인 광고를 보고 나의 두 번째 밴드 구성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록밴드 <펄잼>의 곡 제목을 따서 <이븐플로우>라고 밴드 명을 지었다.

멤버들 모두가 각자 스스로 악기를 터득한 독학파들 이어서 다들 다양하고 독특한 자기만의 음악성과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기존 곡들을 하나씩 카피하면서 호흡을 맞춰나가기 시작한 우리는 즉흥연주를 통해 자작곡들을 하나씩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의견을 모아 곡의 전체적인 구성을 만들고, 이후 각자 맡은 파트를 직접 만들어, 곡 구성이 완성되면 최종적으로 보컬인 내가 보컬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써서 곡을 완성하는 식으로 곡 작업이 진행되었다.

모던록의 감수성, 얼터너티브 록의 강렬함, 펑키 록의 그루브함이 버무려진 우리의 자작곡들을 우리는 ‘모던얼터펑키’ 장르라고 불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작곡들을 모아 각 지역 라이브클럽들과 다양한 록 페스티벌 무대에서 왕성한 공연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소요록페스티벌 2000>에서의 공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멤버들의 입대 문제로 인해 안타깝게도 밴드는 갑작스럽게 해체되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한 멤버들이 제대하기를 기다리며 학교생활에만 전념한 나는 2002년 전남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아버지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했던 나는 레스토랑 웨이터, 미술학원 강사, 가구공장 재단사, 건설현장 기포기사 등 각종 직업을 섭렵하면서 밴드멤버들이 제대하기만을 기다렸다.

록밴드 <수시아블루> 보컬시절 2004년 <대한민국 록 페스티벌> 공연 당시.

하지만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에 남아있던 기타 멤버와 함께 새로운 구성원들을 영입해 <수시아블루>라는 밴드를 결성해 각종 록 페스티벌과 라이브클럽 무대에서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펼치다 2004년 <대한민국 록 페스티벌> 무대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밴드는 해체되었다. 그렇게 10년 동안의 음악 인생을 끝내고 혼자가 된 나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다시 입시를 준비해 200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홍익대를 다시 간 이유는 그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미련 내지는 정당하게 능력을 평가받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오기였던 것 같다. 입시를 망치는 바람에 확인해 보지 못한 나의 능력치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홍대 미대 하면 당시만 해도 미술 쪽으로는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던 학교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경험해본 홍익대와 전남대의 차이는 하나였다.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고 존중해주는 교수들의 태도. 혼자 모든 걸 해내야 하는 건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 다니면서 점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거쳐 온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다. ‘한 학기 600만 원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이 학교를 졸업해서 남는 게 뭘까?’, ‘졸업장과 몇천만 원의 학자금대출, 빚?’ 시간이 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며칠을 질문하고 고민한 끝에 찾아낸 답은 바로 입시 실패 이후 십여 년 동안 잊고 지냈던 꿈, ‘배우’였다. 오래전 망각의 늪에 버려져 있던 배우라는 꿈을 찾아내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짙은 안개가 한순간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를 향해 가려고 했는지, 어디로 가다가 멈춰 서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는지,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 길로 학교를 휴학하고 연기를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가 딱 서른 살이었다.

처음에는 매체 연기 스터디그룹을 찾아서 연기 공부를 했다. 그러다 기본기에 대한 부족함을 느껴 몇 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았고 체계적인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우학교 한별’이라고 하는 영상매체 연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연기 아카데미를 찾아가 1년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온·오프라인을 쉼 없이 뒤지고 찾아다니며 프로필을 돌렸고 단편영화에서 크고 작은 배역을 맡게 되면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2015년 연극 <리어왕>, 콘월 공작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명동예술극장)

연극배우로서 무대에 처음 서게 된 계기와 배우로서 활동하면서 출연한 작품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지만 조급해하거나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늘 내 연기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많은 영화와 연극 공연들을 찾아다니며 보았고 좋은 연극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무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연극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2007년 연극 <우동 한 그릇>이라는 작품의 오디션에 합격해 ‘우동집 주인’역을 맡으며 대학로 연극무대에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면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연을 했던 연극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다. 이정명 원작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연극 무대로 옮긴 작품으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벌어진 궁궐 내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미스터리 추리극 형식의 작품이다.

공개오디션을 통해 ‘세종’ 역으로 캐스팅된 이후 2008년 정동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등에서 3년간 공연했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의 원리를 집현전 학사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직접 고안한 인체해부도를 화선지에다 붓과 먹을 이용해 일필휘지로 즉석에서 그리기도 했고 세종이 자객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에서는 사랑하는 궁녀 소이를 지키기 위해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 액션 장면을 소화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갈 만큼 예술과 언어, 과학 등 다방면에 능통한 천재성을 지녔던 ‘세종’이라는 인물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연기할 수 있어서 너무나 영광이었고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2010년 3년간의 연극 공연이 막을 내린 이후, 2011년에는 원작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살린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송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 다방면을 섭렵하면서 느낀 각 분야의 차이점과 배운 점이 많을 것 같다. 본인에게 ‘예술’ 그리고 ‘예술가’란 무엇인가.

모든 예술은 저마다 그 표현의 도구와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자기표현과 세상과의 소통. 자기 내면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어떤 그릇에 담아서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할지는 각자 개개인들의 선택 몫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든 예술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고 성장한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체험하고 섭렵할 수 있었던 지난 경험들이 배우로서 작품을 분석하고 극 중 인물을 이해하고 구축하고 표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개인적 표현의 영역을 뛰어넘어서 시대와 소통하고 사회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하고 냉철한 시각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의에 대해 당당히 맞서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그것 또한 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왼쪽은 영화 <인랑> 촬영 당시. 오른쪽은 2018년 7월 개봉한 <인랑> 포스터.

포털사이트에 ‘유상재’를 검색하면 영화 <인랑>부터 나온다. 김지운 감독, 강동원, 정우성, 한효주라는 화려한 라인업이었지만 영화가 80만 명 남짓의 흥행참패를 겪었다.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600만) 개봉관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던 상황에서 본인의 생각을 인스타그램에 남긴 것이 기사화가 되었고, 실시간 검색 1위에 오를 정도로 논란이 되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당시 사건에 관해 설명해 달라.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 <인랑>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에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은 김지운 감독님께서 새 영화를 준비하시던 중 전작 <밀정>에서의 내 연기에 대한 믿음만으로 오디션 없이 나를 캐스팅해 주신 작품이었다.

내가 맡은 ‘인랑1’은 극 중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사회 속에서 뮤지션의 모습으로 위장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비니 모자를 쓰고 항상 저격용 총이든 첼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닌다. 그러다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암살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조직 ‘인랑’의 저격수다. 영화 속에서는 여러 장면에서 요인들을 암살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극 후반에는 ‘이윤희’(한효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임중경’(강동원)이 갈등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을 저격용 총으로 겨눈 채 ‘장진태’(정우성)로부터의 사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의외의 명령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디션 없이 영화에 캐스팅된 건 배우 일을 시작한 이후 십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김지운 감독님께서 처음으로 나를 배우로서 인정해주신 거다. 그렇다 보니 영화 <인랑>은 나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촬영에 임했다.

그랬던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하고 내려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을 혼자 넋두리라도 해보는 심정으로 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개인적인 공간’에 일기를 끄적이듯 썼던 글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기사화가 되리라고는, 그것도 “영화 흥행 실패가 관객 탓?”과 같은 사실을 왜곡하는 헤드라인을 달고서 하룻밤 사이 몇십 개의 기사가 쏟아질 거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 난 지인을 통해 연락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황당해하며 인터넷 창을 열어보았더니 네이버 메인화면에 나와 관련된 기사가 헤드라인 기사로 떠 있더라.

나를 만난 적도, 나에게 기사화에 대한 어떤 연락도, 상의도 없이 내가 쓴 글과 내가 찍은 사진들을 무단으로 가져다가 기사로 실어 놓은 걸 보고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날이 밝는 대로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란히 누운 아내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기사를 보고 많이 놀라고 불안했는지 뒤척이는 아내를 다독거리며 아침이 되기만을 바랐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촬영장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당장 나의 모든 SNS를 닫으라고 했다. 아내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인터넷을 열었더니 모든 언론이 나와 관련한 기사를 실시간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내의 사진이 각종 언론의 기사를 통해 무단으로, 무차별적으로 복제 재생산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났지만,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모든 SNS를 급히 닫고 드라마 촬영장이 있는 지방으로 이동했다.

지방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유상재, 비난을 피하려고 SNS 닫아’와 같은 헤드라인을 뽑아대며 ‘비난 몰이’를 하고 있었다. 촬영장으로 이동한 나는 많은 촬영 분량을 소화하느라 대응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해가 지고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내 이름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 순위 1위에 올라 있었고 수십 건이 넘는 기사들은 수많은 악성 댓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언론들은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고, 사실을 왜곡하는 헤드라인을 뽑아댔다. 하지만 기사를 쏟아낸 그 수많은 언론 중, 내게 취재요청을 하거나 사실 확인을 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두서없이 즉흥적으로 쓴 내 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건 당시에도 인정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로 인해 의도치 않게 벌어진 논란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특히, 영화제작진에게까지 들불 번지듯 번지고 있던 비난 여론이 영화에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아내와 관련된 게시물들을 비공개 설정으로 바꾼 다음, 닫아두었던 SNS를 다시 활성화하고 SNS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연예부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과문 게재 사실을 알리고 논란에 대한 소명의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사과문을 실은 십여 건의 후속 기사들이 나왔고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모 사이트에서는 그를 검색하면 관련 문서로 '인랑(영화)'와 '정치병'이 뜬다.

당시 ‘이름을 알리기 위한 노이즈마케팅’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 관심을 받고 싶었으면 애초에 배우라는 직업을 택하지도, 연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배우는 오로지 연기로 평가받는 직업이고 누군가 인정해주고 불러줄 때까지 쉼 없이 연기훈련을 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다방면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를 지속하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직업이다.

그게 배우의 숙명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 또한 쉬지 않고, 꾸준히 연기를 갈고 닦으면서, 묵묵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 뭐가 아쉬워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내 경력과 이미지를 망쳐가며 일부러 논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인지도를 쌓을 바에는 차라리 배우를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득을 취한 건 내가 아니라 기사화를 통해 노이즈를 만들어 낸, 광고로 큰 수익을 얻었을 최초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인지도? 논란이 일단락된 이후 나의 존재는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혔다.

굳이 내가 얻은 게 있다면 ‘정치’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악성 댓글들을 쏟아내던, 없었어도 됐을 다수의 안티들이다. 그들은 논란에 대한 사과와 구체적인 해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적의’를 품고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인랑> 관련 기사들을 찾아다니며 악성 댓글을 다는 거로도 모자라 논란이 불거진 바로 그 시점에 미국에 서버를 둔 한 백과사전 사이트에 나에 대한 게시물을 생성하고는 ‘정치병’이라느니, ‘과대망상’이라느니 하는 식의 인신공격과 폄하와 조롱을 일삼았다.

이 일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와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구나 하고 조금이나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 하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들이 누굴 평가할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니고, 인성이 그 정도밖에 안 돼서 그러려니 하고 무시한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큰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악성 댓글은 설리를 죽였다. 그녀는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보도 내용 중에는 설리의 남자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연예인이면 악성 댓글도 감내해야 한다”라고 하여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연예인이 악성 댓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최선일지 의견을 듣고 싶다.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까지…. 무엇이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연예인이면 악성 댓글도 감내해야 한다’, ‘연예인한테는 막말해대도 괜찮다’라고 하는 이런 식의 일부 대중들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런 악성 댓글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고 함께 노력하지 않는 한, 제2의 설리가, 제3의 구하라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다.

악성 댓글은 연예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인 시스템 차원에서 악성 댓글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하루빨리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라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의 실명을 걸고, 본인의 얼굴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할 수 없는 말이라면, 그 말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할 수 없는 말이다.

익명성에 숨어 편 가르기를 하고, 악성루머를 퍼트려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여론을 조작해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사회를 좀먹는 악성 댓글자들을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야 법과 제도를 개선할 것인가.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녀들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반성해야 할 집단이 있다. 바로 언론이다. 논란이 아닌 것에 ‘논란’ 딱지를 붙이고, 사실을 왜곡해 논란거리를 만들어 내고, 일부러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서 논란을 더 부추기고, 언론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오로지 수익창출을 위한 여론몰이를 하는 데 급급한 일부 언론들의 몰지각한 행태를 오랫동안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심지어 설리의 과거 논란까지도 여과 없이 기삿감으로 실어 고인의 죽음마저도 기사로 팔려고 하는 파렴치한 언론도 있더라. 언론이 미끼를 던져주고 악성 댓글자들이 사냥개처럼 달려들어 대상이 죽을 때까지 물어뜯는, 악플사냥이 만연한 사회. 도대체 “누가 언론에 한 개인을 펜으로 죽여도 된다고 하는 살인면허를 준 것인가?” 묻고 싶다.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언론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익명성에 기대어, 키보드 뒤에 숨어 악성 댓글을 일삼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람 면전에서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은 온라인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연예인이 만만하다고 악성 댓글로 괴롭히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그럴 시간과 에너지를 부도덕한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데 쓰라고. 그게 진정한 용기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유상재는 강태호 독립장편영화 <범털>의 조직보스 '정태수' 역으로 출연하여 얼마 전 촬영을 마쳤다.
영화의 주연인 '범털' 역을 맡았던 이설구 배우와 함께. 

얼마 전 강태호 감독의 독립장편영화 <범털> 촬영을 마쳤다. <범털>은 어떤 작품이고, 맡았던 역할 ‘정태수’는 어떤 인물인지 소개해달라.

해마다 적어도 두세 편의 독립영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배우로 전향한 이후 단편영화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찍은 단편영화만 해도 60편이 넘는다. 그렇다 보니 장편이든, 단편이든 소규모 저예산의 독립영화들에 애정이 많이 가는 게 사실이다. 상업영화 현장과는 또 다른, 뭔가 좀 더 인간적인 교류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가족적인 현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독립영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지속해서 독립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

최근에 촬영을 마친 영화 <범털> 역시 저예산의 독립 장편 영화이다.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나는 경제사범으로 교도소에 수용되어 기존의 ‘범털’과 대립하게 되는 새로운 범털 ‘정태수’를 연기했다. 사기, 폭력 전과 7범의, 사회에 있을 때는 ‘정회장’으로 불리던 기업형 조직의 보스, 메이커 건달이다.

‘범털’이라고 하는 단어는 교도소에서 사용되는 은어로, 돈과 권력을 가진 ‘거물급 재소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교도소 내의 ‘일인자’를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전남 장흥의 교도소 세트장에서 현지촬영으로 촬영을 잘 마치고 2020년 개봉을 목표로 후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주인공 ‘범털’ 역할을 맡은 이설구 선배님은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인랑>에 함께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설구 선배님의 추천 덕에 강태호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고, ‘정태수’ 역할로 출연을 확정을 짓고 영화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비중이 큰 주연급 배역으로 캐스팅되어 부담도 있었지만 믿고 큰 배역을 맡겨주신 감독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서 촬영에 임했다.

영화 <범털>은 갖가지 사연들로 교도소에 수감 된 다양한 인물들의 일상을 잔잔하고 섬세한 드라마로 풀어가는 동시에 새로 입소한 메이커 건달 ‘정태수’의 등장으로 전개되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리얼 액션으로 그려낸 날 것 그대로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극 중 모든 액션 장면들은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해 대역 없이 출연 배우들이 직접 다 소화해냈다. 2020년 새해에 관객들과 만나게 될 영화 <범털> 많이 기대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

2013년 영화 <관상> '홍윤성' 역으로 촬영 당시.

수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며 많은 인연을 쌓았다. 존경하는 배우가 있다면 누구인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관상>, <밀정>을 함께했던 송강호 선배님이 닮고 싶은 배우 중 한 분이다. 촬영 현장에서 항상 진지하게 연기를 준비하시고 카메라가 돌아가면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우고 느꼈었다. 늘 후배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영화 <관상> 때 내가 맡았던 ‘홍윤성’이라고 하는 인물이 극 중 꽤 비중이 큰 인물이었는데 그때의 내 연기에 아쉬움이 있으셨는지, 영화 <밀정>으로 다시 만났을 때 고사를 마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연기를 기교로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을 담아라.”라고 충고를 해주셨다.

‘진심’. 그날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영화 <밀정>을 촬영하기까지, 내가 맡은 ‘박포수’ 라는 인물에 진심을 담아 연기하기 위해 많은 준비로 촬영에 임했다. 영화 개봉 후 뒤풀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 송강호 선배님은 내 연기가 좋았고 멋있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시며 칭찬해주셨다. 연기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정말 기분이 좋았다.

‘진심’. 짧지만 강렬했던 그 한마디가 그 이후의 내 연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배우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지침이 되어주고 있는 소중한 한 마디이다. 송강호 선배님처럼 마음속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그는 시간이 될 때마다 여행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 사진은 2017년 춘천 여행 당시.

지난 20여 년간 달려오기까지 가장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해오면서 힘든 시기도, 좌절을 경험한 적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옆에서 말없이 지켜봐 주고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7인의 초인과 괴물F>라는 단편영화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과 배우로 만난 인연이,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다수의 수상을 하게 되면서 잦은 자축모임의 자리로 이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gpkfw7mb3tA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지면서 동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해 6년의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께 가정을 꾸려 인생의 동반자가 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다. 부분은 다르지만 서로 같은 분야의 일에 종사하다 보니 누구보다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서로의 일을 존중해주면서도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좋은 파트너다. 소소한 일상들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과 의미를 느끼며, 딸처럼 키우고 있는 예쁜 고양이 둘과 함께 하루하루를 감사해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왔지만 정작 ‘이제부터가 배우로서의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절반을 산 시점에서 지나온 나의 삶을 다시 되짚어 보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글렌다 박 기자님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만나 소통하고 좋은 연기를 통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계속 회자 될 수 있는 좋은 배우로, 사람 냄새나는 인간적이고 진솔한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2020년에는 우리 사회가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맹목적인 시기와 질투와 비난만을 쏟아내는 묻지 마 악플이 난무하는 그런 각박한 사회가 아니라, 돈이 없어도,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꿀 수 있는,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힘든 시기에 놓여 있거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작은 무엇이라도 꿈꾸고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해에도 모든 분의 가정에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하시길 기원 한다.

 

사진제공: 유상재 루이스픽쳐스
영상제공: JAY PARK FILM

 

[배우 유상재는...]

1976년 4월 6일 출생

순천금당고등학교 졸업
전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회화과 중퇴

<작품 활동> 

•영화
2019 <범털> - 정태수 
2019 <빛의 기억> - 젊은 상일 
2019 <스파이형 모델> - 김경위  
2019 <얼굴 없는 보스> - 목포파1  
2018 <말모이> - 북만주 일본장교  
2018 <국가부도의 날> - 기획재정부 2차관 
2018 <안시성> - 연개소문 부관  
2018 <인랑> -  인랑1
2016 <밀정> - 박포수 
2014 <군도> - 7인의무관3  
2013 <관상> - 홍윤성
2012 <베일> - 박영식   
2012 <범죄와의 전쟁> - 형배 조직원11  
2011 <검은 갈매기> - 정경사  
2011 <혈투> - 청군 척후부장  
2011 <짐승> - 박대위 
2010 <고치방> - 주식투자남 
2009 <대한민국1%> - 2소대장 
2007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 기차 만주군 경찰

•독립(단편)영화
2012 <숨바꼭질> - 민수(주연-50분, 중편-다수 해외영화제 작품상 수상) 외 60 여 편

•드라마
2019 <이몽> - 로쿠(MBC)
2019 <사자> - 양동이파 보스(사전제작)
2019 <나의 나라> - 금오위장(JTBC)
2019 <간택> - 의금부도사(TV조선)
2018 <손> - 박홍주의원 보좌관(OCN)
2018 <미워도 사랑해> - 흥신소남자(KBS1)
2017 <의문의 일승> - 명진서 팀장(SBS) 
2017 <크리미널마인드> - 경찰특공팀장(TVN)
2017 <이름 없는 여자> -  형사(KBS2)
2017 <돌아온 복단지> - 김철중(MBC)
2017 <보이스> - 병원 보안팀장(OCN) 
2017 <맨투맨> - 검찰수사관(JTBC)
2016 <내 마음의 꽃비> - 승재비서(KBS2)
2016 <굿바이 미스터 블랙> - 김비서(MBC)
2016 <육룡이 나르샤> - 무명무사(SBS) 
2015 <신분을 숨겨라> - 최철한(TVN)
2013 <독도평전> - 당상관 이정길(EBS)
2014 <쓰리데이즈> - 대통령경호2팀장(SBS) 
2013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이시백(JTBC)
2012 <인수대비> - 유자광(JTBC) 
2012 <스트레인저6> - 조영수(일본후지TV) 
2011 <뿌리깊은 나무> - 금부도사(SBS) 외 다수

•연극
2015 <리어왕> - 콘월 공작 /명동예술극장(국립극단) /윤광진 연출 
2010,2009,2008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 세종대왕 /정동극장,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외 다수 /박승걸 연출
2010 복합장르음악극 <나무> - 여행자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김아라 연출
2009 Physical theatre <맥베스> - 맥베스 /아름다운극장 /이명일 연출
2008 <적빈> - 덕배, 노인, 건달 /연우소극장, 아트씨어터문소극장, 거창국제연극제 /김국희 연출
2007 <우동 한 그릇> - 우동집 주인 /김동수컴퍼니 /김동수 연출 외 다수

•뮤직비디오 
김지수 - ‘가을이 오네요’(2011, 남자 주인공)

•음악
록밴드 이븐플로우 보컬(1999~2000)-2000 소요록페스티벌 공연
록밴드 수시아블루 보컬(2003~2004)-2004대한민국록페스티벌 공연

•광고 
SK가스(메인모델), 맥심, 잡코리아, 아이코스, 핸즈, 현대기아자동차, 옥션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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