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처음 접한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이었다. 이 책을 접했던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매달 용돈을 받으면 서점부터 방문하는 습관이 있던 시절이었다. 용돈 받는 날 동네 작은 서점에 방문했다가 가판대에 진열된 <개인적인 체험>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세계 최고 권위가 있는 상이 노벨문학상이라는 건 알고 있던 때였고, 책 제목도 마음에 들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책을 샀다. 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입시에 몰두하게 됐다. 문학에 관심이 없어져, 노벨문학상 수상작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대학 입학에 성공한 후 졸업 전까지 400권의 책을 읽기로 독서계획을 세웠다. 소설을 읽고 싶을 때마다 고전을 찾았다. 가장 먼저 읽게 된 소설은 <죄와 벌>이었는데,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읽기 시작했다가 입시철이 되며 다 읽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 후 가장 먼저 완독한 책이 되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사진출처: 예스24)
고교 시절과 달리 이해력이 높아진 상태에서 읽어나가다보니 빠르게 독파하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시작으로 <안나 까레리나>, <부활> 등을 연이어 읽었다. 투르게네프도 읽고, 러시아 문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푸쉬킨도 맛 봤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빠져 그의 전집을 읽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헤르만 헤세’도 접하게 됐다. 헤르만 헤세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데미안>부터 시작해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까지 물안개처럼 자욱한 불길한 감성의 미학을 연이어 느낄 수 있었다. 이후 토마스 만을 읽었고, 귄터 그라스를 잠시 뒤적이기도 했다.
러시아 문학을 거쳐 독일 문학을 읽고 보니 당연히 프랑스 문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문학은 고등학교 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어린 왕자>와 같은 현대인의 고전은 서른 번을 넘게 읽기도 했다. 그러다 카뮈를 접한다. <이방인>으로 시작한 그의 책은 이화영 교수가 시리즈로 번역했기에 상당수를 접하게 됐고, 카뮈의 경쟁자였던 샤르트르의 <구토>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섭렵했다. 이후 제2의 카뮈로 칭하는 르 클레지오의 첫 작품 <조서>』를 읽었고, 연이어 그의 작품을 여러 권 읽었다.
J. M. G. 르 클레지오, <조서> (사진출처: 예스24)
일부러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찾아 읽은 건 아니었고, 일부러 수상작가의 작품을 연독한 것도 아니었다. 다. 고전문학으로 추천된 작품들을 읽다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었고, 한 작가를 골라서 그의 작품을 죽 읽는 독서법을 개인적인 독서 방법으로 삼다보니 이런 우연의 일치가 ‘그대로 읽기’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가 많이 누적된 데다 매년 한 명씩 늘어나는 수상자의 작품까지 모두를 읽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나중에는 그해에 선정된 작가의 대표작 위주로 읽었다. 수상자들이 대개 다작 작가여서 적게는 5권, 많게는 10권을 모두 읽었고, 이를 모두 읽기 위해 적어도 한 달은 그 작가에 빠져 살아야 했다.
새로운 작가라는 씨앗을 내 마음에 뿌리고 싹이 트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으니, 나중엔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새롭게 등장하는 시기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재미있나?
시대와 사회를 읽을 수 있다!
필자에게 독서는 습관이다. 책을 읽는 순간이 즐겁기도 하지만,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개인적인 위안이 크다. 다독하는 편이지만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다. 사람에 따라 문학책 읽기를 힘들어하기도 하고, 특히 철학 책은 힘들다고들 한다. 책을 꾸준히 읽다 보면 내용에 익숙해지고 작가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게다가 노벨문학상을 읽는다고 하면 우쭐한 기분마저 든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적어도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전문가들이 검증한 책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단, 전문가의 검증과정이 있기에 엘리트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는 너는 엘리트!”라는 자찬을 할 수 있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건 노벨문학상은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나다고 해서 수여하는 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고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문학이기에 예술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예술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선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사드를 연상하게 하는 사도마조히즘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모녀의 애정행각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파격적인 주제를 소설의 세계로 창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200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렇게 노벨문학상은 재미보다는 파격을 경험하게 하고, 시대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안경을 제공한다.
다양한 사람, 다채로운 배경
전 세계 문학여행을 떠나자!
노벨문학상 작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는 프랑스다. 주로 유럽과 미국 작가들이 상을 받았으며, 남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종종 수상자가 나온다. 물론, 일부 지역에 국한된 건 사실이지만 할리우드 스타일에 익숙한 대중들이라면, 주제, 배경, 인식 등에서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작품을 서술하는 기법도 다양해 흔히 접하기 힘든 문학 양식을 경험하다가 작가의 마력에 빠지기도 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다 보면 마술적 사실주의 색채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솔직히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법이 아니어서 소설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이해도 잘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가계도를 따로 그려놓고 분석할까?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남미 소설이 품고 있는 열기와 습도를 느낄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느낄 수 없는 끈적함이 있다. 일본 작가의 작품은 항상 겨울이다. 배경도 겨울이 많다. 독일은 딱딱하다. 작가마다 다르긴 하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다. 프랑스는 생각이 많다. 예쁜 배경을 심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럽 작가들을 좋아한다. 작가들이 대체로 자신이 사는 세상을 삐딱하게 보면서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사진출처: 예스24)
또 대부분 수상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도 숱한 이슈메이커였다. 국내외 문학상은 거의 휩쓸고, 작가로서 유명세가 이미 있는 사람들이다. 그쯤 되어야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이 보수적인 성향이었다면 수상자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노벨문학상을 진보 성향이라 단정하자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을 읽는 여정 또한 멋진 여행이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꿈꾸지만 마음대로 여행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행은 자유를 의미한다. 일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시간이다. 얽매이지 않고, 익숙한 현재를 떠나 낯선 미래로 향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은 익숙하지 않다. 정말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숙소부터 맛집까지 철저히 알아보고 떠나는 낯선 곳을 향한 여행과 같다.
그렇다고 너무 준비하려 하지는 말자. 그냥 출발하자. 느끼고 생각하고 어려워하고, 마력에 빠져 보자. 뭐 더 있겠는가? 그대로 읽자! 그대로 느끼자! 하나 더 넣고 싶다면 같이 읽고 느끼자! 혼자 이해 못하고 있음에 좌절하지 않고 ‘원래 이렇구나!’라고 하면서 안심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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