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일 통일(76)] 1990년까지 유지된 두 국가 체제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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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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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와 보수 세력은 내부지향적인 독일민족과 민족주의가 아닌 유럽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동등하게 함께 살아가는 독일민족이 실현될 때 비로소 독일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유럽통합 속에서 독일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우호와 평화를 유럽 정책의 제1로 설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독일의 산업 중심지인 자르란트를 국제관리 하에 두고 오늘날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석탄철강기구를 창설하고 이어서 유럽공동체 결성의 창설국으로 참여하여 서독을 유럽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참여시키면서 독일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사민당은 일찍이 1925년 하이델베르크 강령에서 유럽정책에 관해서 유럽 평화를 위하여 “유럽합중국”창설을 제안하였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한 빌리 브란트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전체로서 유럽의 평화질서”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립하였다. 민족 특히 독일민족의 형성은 1860년대 이후 유럽의 평화질서를 교란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강령적 배경에서 사민당-자민당의 브란트 총리 정부는 냉정하게 동방정책을 새로이 하였다. 우선 2차 대전 후 구축된 동유럽 질서를 현상 그대로 인정하였다. 동부 국경 문제 즉 동독과 폴란드의 국경인 오데스-나이쎄 선을 인정하였다.
이는 2차 대전 후 소련에 귀속된 과거 폴란드 영토에 대한 소련 영유권 인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영유권도 인정하였다. 그리고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였다. 1972년 완성된 브란트 정부의 신동방정책은 유럽 역사에서 늘 그랬듯이 현상의 인정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한 달 반만에 나온 1989년 사민당의 ‘베를린 강령’과 ‘유럽에서의 독일인, 사민당 베를린 선언’에서도 ‘국경의 불가침’, ‘폴란드의 서부 국경의 무조건 인정’을 선언하고 있다.
현상의 인정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역사 특히 19세기 독일 민족의 통일과 독일 제국의 성립 후 유럽의 불안은 서쪽으로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동쪽으로 폴란드와 소련 침공이었다. 이에 더하여 소련의 입장에서 독일은 침략의 길목이고 직접적 침략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브란트의 신동방 정책은 소련의 불안 해소에 대한 다짐이자 신뢰조성 정책이며 이의 징표가 폴란드와의 국경 인정과 동독에 대한 사실상의 국가 승인인 ‘두 개의 국가’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후 1990년 통일될 때까지 독일의 ‘사실상’ 두 개의 국가체제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동독은 ‘사실상’이란 수식을 버리고 실질적인 두 국가 체제를 지향하였다.
서독의 두 개 국가 체제 유지 정책은 통일(재통일)을 기본법상의 통일과제로 관념화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이 체제를 현실로 수용하게 하여 동독을 사실상 외국으로 보게 하였다. 1989년 호네커 정권이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12월 20일 무렵 동독 시민의 입에서 ‘통일’이란 구호가 나올 때까지 서독 사회는 동독 내의 사태 발전을 동유럽권의 민주화운동 열풍 속의 어느 한 나라의 일로 보았다. 당시 서독의 언론도 이런 시각에서 동독의 민주화운동을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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