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일 통일(77)] 동독 시민들의 통일 요구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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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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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시민의 통일 요구가 본격적으로 나오자 서독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도 독일통일 문제를 현실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였다. 1945년 유럽평화 문제를 강대국이 독일 분할로 보장하려고 하였다면, 1990년에는 유럽 평화질서 구축을 독일통일의 기초 위에서 모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후의 통일 과정은 앞에서 적은 그대로다.
통일의 주체는 동독 시민이다. 동독 민주화운동과 통일 요구의 의미를 적기에 포착하여 통일로 이어간 지도자는 헬무트 콜 총리다. 독일민족, 독일 분단과 유럽의 평화질서 간 관계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서독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도한 정서를 표출하지 않고 냉정하게 전승 4강국의 권리를 인정하고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에게 현존의 국경 인정을 거듭하면서 이들의 동의를 얻어내어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사민당의 유럽 평화질서 속에서 ‘민족의 극복’이란 이상적인 접근이 당장의 현실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반통일 세력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1990년 3월 동독 자유 총선에서 가장 완결된 선거강령을 제시한 동독 사민당이 세를 모으지 못하였고 통일 후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사민당은 구 동독 지역에서 힘을 못 쓰고 있다.
과거 동독의 독재체제를 이끌었던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사당과 사민당을 탈당한 사람들이 결성한 좌파당(Die Linke)은 물론이고 민족을 노골적을 내세운 극우 ‘독일의 대안(AfD)’에도 밀리고 있다. 너무도 이상적이었거나 통일 시에 동독 주민들의 불안감을 달래 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들의 관심은 일자리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작게 지켜왔던 재산이었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법적 보호수단을 갖추지 못한 채 통일조약과 이후의 “미확정 재산규율법” 그리고 서독법의 적용으로 속절없이 당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 따른 “사실상”의 양국체제는 동서독 간에 긴장을 완화시켜주고 말 그대로 동독 주민의 “인간적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1989-1990년 사이에 실제 벌어진 사태를 보면 동서독 모두 통일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통일방안만 보아도 정해진 것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동독 시민에게 돌아갔다. 통일의 주체이지만 통일의 피해자인 셈이다. 소득 격차, 실업률 모든 면에서 동서독 주민 간의 격차는 여전하다.
납세자들의 연대세(Solidaritätszuschlag) 외에 구 동독 5개주에 대한 재정지원을 위한 구서독 지역 연방주와 연방정부간의 연대협약(Solidarpakt) 등을 통하여 동독지역 경제 재건에 나섰지만 양 지역 간 격차 완화는 극히 더디다. 그 원인은 사실상 서독이 동독을 접수하면서, 근본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통일, 특히 동독 주민의 재산권 보호와 고용 보장 등을 통한 자구적 노력의 기반 마련에 소홀히 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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