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일 통일(75)] 19세기 독일 역사가 보여주는 분단 체제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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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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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하였듯이 독일의 분단은 19세기 이전의 독일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유럽의 기존질서의 안정과 독일민족의 형성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미 근대 유럽 국제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체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이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이 전쟁의 결과를 처리한 비인 회의는 유럽의 안정을 위하여 유럽 중부 즉 대체로 현재의 독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이전 질서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강대국의 이해가 얽히면서 완전한 복원이 아닌 39개의 독립된 연방으로 나누어진 독일을 복원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파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근대적인 독일민족이 형성되고 이를 발판으로 드디어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였다. 그런데 독일 주변의 나라와는 달리 독일의 자유주의는 관념화되었다. 이는 이전에 파편화되어 있고 산업발달이 늦었던 독일에서 시민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념화된 자유주의는 독일에서 시민에 의한 국민주권이 아닌 황제주권의 독일제국을 낳았다.
이것이 위로부터의 독일 자본주의 발달과 결합되면서 대외팽창으로 나가고 열강과 부딪히면서 1차 대전을 야기하였다. 1차 대전 후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형식 면에서는 모범적인 헌법을 가진 이상적인 공화국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8년 혁명의 결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탄생하였다.
하지만, 구체제의 기득권 세력인 토지귀족(Junker), 독점자본이 온존한 데다 시민의 정치 참여 부재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비상대권을 가진 군주적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었다.
중부 유럽 즉 독일의 약화를 통한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프랑스 중심의 베르사이유 평화체제는 독일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1,320억 금(金)마르크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조건 하에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의한 사회적 불안은 민족사회주의 출현의 조건을 조성하였다. 민주적 정치 참여의 경험이 없는 대중은 민족사회주의에 동원되어 이들의 권력 장악을 저지하지 못하고 이들의 사이비 민족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는 2차 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29년 10월 미국 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과 대량실업으로 인한 독일 사회 내부의 불안은 독일 선거에서 의회와 정부를 이끌 정당을 거듭 내지 못하면서 정부 구성에 차질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당 연립의 약체 정부는 1930년 3월 대공항의 절정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갈 수 없어서 붕괴되자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의 대통령의 긴급조정권에 기초한 소위 대통령 내각이 계속되었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역시 이 권한에 따라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였다. 이후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권위임법을 통하여 히틀러가 절대권력을 창출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처럼 나치 독재와 2차 대전 발발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주적 대통령제도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 국민은 패한 국가의 국민인지, 민족사회주의의 피해자인지 애매한 상황에서 치욕적인 전승 4강국의 점령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령국의 4-D 정책 즉, 탈나치화(De-Nazification), 민주화(Demancratization), 탈군사화(Demilitarization), 탈카르텔화(Decartelization) 정책의 일환으로 민주주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를 지식인들은 패전이 아닌 새로운 역사의 시작(Null Stunde)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민족, 유럽 전체, 유럽의 평화의 관점에서 독일을 새로이 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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