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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드는 공간, 함께 만드는 동네(1)] DIT 전문기업 '오롯컴퍼니'의 시작

윤준식 기자 승인 2021.10.19 00:04 | 최종 수정 2021.10.19 00:30 의견 0

도시재생 스타트업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님과 함께 하는 DIT 이야기.
첫 회에서는 오롯컴퍼니 창업기를 들어보며 DIT 전문분야를 개척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윤준식 편집장(이하 '윤'): ‘지속 가능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와 연속 대담을 기획했습니다. 대담 제목을 ‘스스로 만드는 공간, 함께 만드는 동네’로 정했는데요. 이 주제는 그동안 이종건 대표가 활동한 것 중 ‘DIT’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이하 '오롯'): DIT라는 용어가 좀 생소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 DIT가 어떤 것이며, 제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윤: DIT(Do it together)가 DIY(Do it yourself) 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오롯: 이전부터 미국에서 함께 만드는 행위들을 DIT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다양한 도시재생 지역에서 공동체 프로그램의 형태로 공간을 개선하는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책연구소에서 이런 사례들을 발굴하고 있어요.

윤: DIT 사업으로 대표적인 기업이 <오롯컴퍼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제가 듣기로는 DIT가 사업자 입장에서는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취재하면서 알게 된 건축 관계자분들에게 유튜브 동영상이나 현장 사진을 보여드리고 말씀을 들어봤더니 “이거 단가가 안 맞는 일인데...”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님이 회사의 수익을 위해서 DIT 사업을 추진하고 계신 건 아닌 듯한데, 기업의 비전과 미션 등이 DIT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DIT 현장에서 오롯 컴퍼니를 많이 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오롯: 저희가 건설업으로 등록돼 있는 시공 회사이기도 하고, 도시재생에서의 공동체 작업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연결하고 싶은 욕망이 컸어요. 시공 인테리어 및 집수리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시작점 자체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고자 동료들이 모여서 공간을 꾸미다가 시공회사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원하는 공간을 직접 만들어주고 돈이 없으면 시공하는 법을 가르치며 같이 만들기도 하다 보니 이런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게 된 거죠.

<오롯컴퍼니>가 처음 상도동에 조성한 공간. 커뮤니티 디자인을 위해서는 주민들과 만날 공간이 필요했고, 그런 아지트를 만들기 위한 최초의 작업이었다. (오롯컴퍼니 제공)

윤: 우선 <오롯컴퍼니>라는 회사와 이종건 대표님 소개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일단은 개인적인 <오롯컴퍼니>를 설립하시게 된 경위까지 말씀해 주시면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오롯: 저는 원래 건축가가 되고 싶었어요. 건축학도였어요. 젊은 시절에 돈도 없고 그러니까 4년간 군장학금을 받고 7년 정도 군 생활을 했어요.

윤: 장기 복무를 하셨네요?

오롯: 대학 졸업하고 군 생활 끝나고 나니까 35살이 된 거어요. 늦은 나이에 제 목표대로 건축가가 되려면 설계사무소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떤 건축가가 될 지 고민 많이 하고 군대를 나왔어요. 그러다가 “동네를 잘 아는 그런 건축가가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전역하자마자 했던 게 동네를 공부하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 제가 돈도 없었고 여러 가지로 어디서 정착 할 지를 고민하다가 그냥 꽃이 좀 많은 동네에 정착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곳이 도시재생 지역이었던 거예요. 그 때가 2016년도니까 도시재생을 하고 있는 지역이 서울에서도 딱 7개 동네 정도밖에 없을 때였는데, 이게 필연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우연하게 그 곳에서 지내게 된 거죠.

그 곳에서 도시재생대학이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는 우연히 발굴된 주민으로 도시재생 센터에 들어가게 됐고 처음에는 주민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정주성과 주거환경 개선에 대해서 저 혼자서 생각을 했었는데, 주민활동을 하면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되게 소름이 돋았어요.

윤: 중간에 좀 용어의 정의라고 할까요? 도시에서 살고 있지 않으신 분들은 굉장히 생소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주민이 무슨 보석도 아니고 ‘발굴된 주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오롯: 도시재생 지역이라는 곳은 안 그래도 청년이 줄어드는 지역이고 주민들이 줄어들거나 노후된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청년이 없는데, 그나마 있는 청년들은 보통 일하러 가죠. 그래서 청년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제발로 찾아온 건축 전공자이자 디자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들어왔으니, 뭔가 발견했다는 느낌으로 ‘발굴된 주민’이라는 표현을 저한테 썼었고 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뭔가 내가 보석 같은 느낌도 드는 것 같기도 했어요.

이게 건축가가 되기 위한 길 그냥 단순히 건축사를 취득하고 그런 면허를 따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일에 같이 함께하고 종사해도 좋지 않을까. 그 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정도로 가볍게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지금처럼 4대 보험이 들어가는 그런 직업이 아니었고 전문가 위촉직이라고 해서
15일 출근해서 일하고 월급을 받는 방식이었거든요. 저는 좀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하면서 건축가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윤: ‘정주’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일반인들은 ‘정주행’이라는 건 알아도 ‘정주’, ‘정주성’이라는 말이 생소하거든요?

오롯: “내가 살고 싶은 곳에 계속 살 수 있는 것” 이걸 ‘정주하다’라고 하는데 정주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이나 성향을 가진 정책들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서 정주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윤: 그래서 도시재생 시민대학을 통해서 발굴된 시민이 발굴된 주민이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그 지역에 좀 더 정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정리가 되네요.

오롯: 정주하고 싶어서 상도4동이라는 곳에 꽃이 많아서 그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고, 그 동네를 공부하다가 도시재생센터를 만나게 됐고요. 내가 그렇게 됐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시재생센터에 들어가게 됐죠. 그 때는 사실 창업을 생각한 적은 없어요.

윤: 그때만 해도 건축사 사무소에 들어가서 일하겠다고 생각한건가요?

오롯: 저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걸 위한 사전 작업 같이 생각을 했었고... 그때 당시에는 도시재생이라는 말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거의 안 나왔고요. 관련 포럼을 가야 도시재생 얘기가 나올 정도였어요. 그런데 여기서 특이 사항이 있는데, 제가 일반적인 근무를 하는 직장인이었으면 그런 포럼을 듣지 못했을 거예요. 월 15일 출근이라는 게 저한테는 기회가 된 거죠.

윤: 주 4일 정도 근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오롯: 주 4일 정도를 한 달 근무 한 걸로 보면 한 15일 정도 되거든요. 평일 하루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우연이지만 일을 하게 되었으니 도시재생이 왜 만들어졌을까,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가 궁금했어요.

피상적으로 나와 있는 사업으로서의 도시재생이 아니라 이게 어떤 방향성을 가질까가 더 궁금했고, 그 시점에 막 도시재생이라는 것을 두고 사업으로 만들어내고 앞서 나가시는 분들의 치열한 토론이나 포럼들이 많이 열렸어요. 그래서 주 1회 행사를 참석 했습니다. 그게 저한테는 시야를 트이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요.

상도동 아지트 작업은 DIY로 출발해 DIT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혼자의 작업에서 함께하는 작업으로... 공간의 개방은 개인의 아지트에서 마을의 거점공간으로... (오롯컴퍼니 제공)

윤: 말씀하신 것만 정리해 보면 연구원으로 취업하신 것 같은데요?

오롯: 원래 제 성향이 연구하는 걸 좋아합니다. 나중에 만든 리빙랩도 제가 만들려고 만들었던 게 아니라 곰팡이에 호기심이 생겨서 연구하다 리빙랩이 되었어요.

(다시 2017년도로 돌아가서) 우연한 기회에 대출을 받을 일이 생겼어요. 은행을 갔더니 재직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하더군요. 근데 제가 4대보험이 들어가는 고용형태였기 때문에 재직증명서를 뗄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구청 소속이라고 했는데, 사실 구청 소속은 아닌 거죠. 센터에서 근무는 하고 있으나 구청 소속이 아니니까 구청에서 재직증명서를 떼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 “그럼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겠구나!” 저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코디네이터들은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비슷한 상황의 활동가들을 모으다보니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법인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윤: 조직을 만든거군요.

오롯: 조직화 훈련은 군 생활 하면서 많이 해왔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조직화를 할 수 있었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다보니 사회적 경제 공부부터 시작했어요. 아까 저한테 연구원같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찬가지로 법인을 설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적 경제 공부도 심도있게 했었어요.

당시에 제가 대출을 받으러 갔던 곳이 공교롭게도 신협(신용협동조합)이었어요. 마침 거기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경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금융기관을 갔다가 사회적 경제를 운명처럼 만나게 됐던 거죠.

근데 참 협동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끝에 포기했습니다. 원래 돈을 벌려고 법인 차리고 사업했던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준비했던 걸 본 동료가 “사회적 기업을 해보는 게 어때?” 이런 얘기를 해서 “그러면 주식회사를 만들면서 사회적인 공헌도 하면 좋겠구나”하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기업을 생각했는데 막연하잖아요.

윤: 참 그분 감사하네요. “인맥도 있고 조직력도 있으니 다단계를 해보거나 코인을 팔아라” 이렇게 얘기를 하셨으면 아마 지금쯤 여기서 뵙고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오롯: 또 운이 좋았던 게 그 동료였던 코디네이터 분이 지방에서 올라와 잠시 쉬는 셈 코디네이터를 하고 계신 분이었는데, 기존에 하셨던 일이 사회적 경제 분야였고, 사회적 기업들을 키우는 우수 멘토 수상까지 하셨던 분이었어요. 저랑 같은 코디네이터로 일할 분은 아닌데, 서울에 딸이 있고 딸이 사는 곳에서 뭔가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지역을 위한 공헌을 하자... 수없이 많은 기업을 키워온 분이신데, 너무 감사하게도 제에게서 기업가로서의 자질이 보였다고 해요.

공교롭게도 그때가 2017년 말 쯤 되거든요? 그런데 국토교통부에서 2018년도에 처음으로 도시재생 특화로 예비 사회적기업을 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제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공유 공간이나 이런 것들이 왜 사회적인 공헌이냐 사회적인 활동이냐 합의가 안 되어 있었을 시기인데, 도시재생의 시작으로 공유 공간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공간들이 되고 기반조성 사업으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합의가 되던 때였어요.

저는 그런 공간들을 만드는 아이템으로 사회적 기업에 도전해 볼 수 있게 된 거죠. 또 제가 코디네이터였잖아요? 도시재생에서는 어떤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주민들을 교육하던 사람이니 당연히 제가 그렸던 기업을 작성하여 제출했더니 바로 선발된 거죠. 그러니까 돈을 벌려고 시작한 사업이 아니라 진짜로 도시재생을 추구하는 기업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윤: 그러면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도시재생의 개념이거든요? 사실 저도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봐서 익숙해지긴 했는데 “도시재생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저도 답변하기가 어려워요.

오롯: 도시재생 사업 자체가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서울에서 주도했었던 도시재생에서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도시 뉴딜 일자리 사업까지 확대되며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들의 도시재생이 시도됐는데, 다 얘기하기는 좀 힘들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도시재생을 쉽게 얘기를 하면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어 가는데, 이런 것들을 주민 스스로가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마중물 사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이 사업이 계속 변형되지만 전체적인 기조는 변하지 않거든요? 주민이 성장해서 직접 할 수 있도록 주민 역량 강화 사업으로 ‘도시재생대학’같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기반 사업들이 작게는 1억, 크게는 200~300억 정도 지역에 투입이 되면서 하드웨어 사업부터 소프트웨어 사업까지 연결되는 사업입니다.

윤: 간략하게 도시재생 사업에 대해서도 짚어보게 되었는데요. 도시재생을 하는 회사를 설립을 하게 됐다가 이게 처음에는 협동조합으로 실험을 해보고 그 다음에 (사회적)기업을 설립을 하게 된 거죠?

오롯: 저도 협동조합 설립까지는 못 갔고요, 창립총회까지 열고 너무 협동이 안 되니까... 저는 마음이 급해서 빨리 법인을 설립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협동조합의 과실에만 관심이 있지 같이 만들어가는 거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정관을 읽어본다거나 사업적으로 차분히 검토하고 토의하지도 않고 “언제 만들어져?” 이렇게 묻기만 하고... 그래서 사회적기업 육성 사업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쯤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 “코치로서의 역할,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진짜 선수로 한번 뛰어보고 싶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죠.

여러 가지 형태의 법인이 사회적 기업이 될 수 있지만, 시장 경제 속에서 경쟁력을 가지면서 보완 경제로서의 사회적 경제를 꿈꿨기 때문에 (효율적 의사결정으로) 시장성이 있으면서도 공공성을 띄는 주식회사형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제 성격과 좀 맞았던 것 같아요.

윤: 설립을 하셨던 당시가 상도동이었던 거죠? <오롯컴퍼니>를 검색해 보면 상도동에 있었던 걸로 옛날 지도에 나오고 있어요.

오롯: 거기가 전역하고 터를 잡았던 곳이에요.

윤: 거기가 꽃이 아름다운 동네였군요?

오롯: “주변에 꽃이 많으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나름대로의 판단력으로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지역에서 터를 잡고 싶었던 거고요.

윤: “누군가의 집에 제비가 집을 지으면, 그 동네에서 제일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다? 이런 것처럼

오롯: 약간 그런 느낌이죠. 처음부터 시공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아니었어요. 그냥 뭔가 이런 공동체 커뮤니티 같은 활동들을 하면서 어떻게든 되겠지...

그곳에서 돈을 벌겠다고 창업 공간을 만들었던 게 아니라 제가 코디네이터 또는 갈등 관리자를 할 때 관공서에서 할 수 없었던 뭔가 이렇게 주민 만남을 할 때, 제가 느꼈던 피상적인 만남이 싫어서 속 얘기도 좀 하고 싶고, 술도 한 잔 하면서 밤새도록 동네에 대한 얘기도 하고, 토론도 해보고 싶어서 당시 시장통 끝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서 만들었고요.

정주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그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아지트가 거점공간으로 변화해 갔다. (오롯컴퍼니 제공)

윤: 대담 처음 시작할 때 ‘커뮤니티 디자인 회사’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원래 <오롯컴퍼니>를 설립할 때 설립 목적은 커뮤니티 디자인이 목적이었던 거지 시공회사가 아니었다?

오롯: 커뮤니티 디자인 자체 그러니까 뭔가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는 게 목표고 수단으로서 건설업을 택한 거죠.

윤: 그럼 커뮤니티 디자인에 대해 보충설명해 주세요.

오롯: 이게 우리나라 말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한데요. 공동체 조직화와 그걸 통해서 만들어지는 유형의 공간들 또는 인간 관계가 포함되는 용어더라고요.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건 아직 없고요.

사례를 찾아보면 “누군가가 어디에 들어가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돼 가지고 마을이 변화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일종의 마을 만들기라고 볼 수도 있고, 공동체가 형성되며 공간이 만들어지는 걸 수도 있고,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까지 다 적용이 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윤: 그런 인프라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공력을 먼저 갖는 걸로 시작한 거군요.

오롯: 시공도 제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필요한 공간을 동네 친구들하고 같이 페인트칠하고, 전기 고치고 꾸민 다음 주민들을 초대해 계속 회의를 했거든요? 어느날 주민이 창업을 한 대요. “우리 공간도 좀 꾸며주면 안 돼?” 그게 첫 공사였는데 매출액이 80만 원이었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예산인데 너무 기뻤어요. 누군가 나한테 공사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재료비만 100만원 들었어요. 그런데 시공인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건축학도 시절에 만들었던 건축 모형처럼 1대 1 스케일의 모형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공사를 했어요. 그런데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요? 고프로 액션캠같은 것을 설치해 작업영상을 찍었고 SNS에 올렸죠.

근데 그걸 보고 어느 분이 “우리도 좀 해 줘” 1천만 원이 넘는 공사였고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렇게 세 번째 공사까지 3천만 원 넘는 그런 공사까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공회사가 된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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