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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일기(31)] 4월 3일(일) 매너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닙니다

조연호 작가 승인 2022.06.23 15:00 의견 0


교회에 가기 전에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어제 무리 한 듯해서 평소 산책 코스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벚꽃이 만개해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죠. 20대만 하더라도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풍경을 봐도 좋은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면 별로였죠. 물론, 지금도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다만, 혼자서도 좋은 곳에 가면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연륜이 생긴 것이죠.

철은 바뀌어 봄의 절정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복장도 한결 더 가벼워졌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인간의 평소 습관인 듯합니다. 과거에 제가 살았던 곳은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많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신호등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솔직히 자주 무시했습니다. 야간에 운전할 때는 빨간 불도 무시하고 지나갔고, 걸을 때도 차가 안 다니면 역시 무시하고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기본적인 교통신호를 잘 지키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가 다니는 산책길에는 몇 군데 신호등이 설치돼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3군데입니다. 이 중 한 군데는 워낙 차가 많이 다니니까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곳인데, 나머지 두 군데는 차가 자주 다니지 않습니다.

‘이렇게 차도 안 다니는 데, 횡단보도로 만들지 왜 신호등을 설치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행자는 신호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나마 주거지역 쪽 신호등은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조금 있는데, 다른 곳은 아예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100명 중 99명은 지키지 않는데, 여기서 신호를 지키는 사람 한 명이 바로 저입니다. 혹여 다른 사람 중 신호를 지켜 건넌다면, 우연히 신호가 바뀌었을 때 건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시설물을 설치한 공공기관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지키지 않으면서 시민인 척 하는 사람들의 잘못일까요? 자동차 질서도 문제지만, 기본적인 보행신호를 지키지 않는 시민의식도 문제인 듯합니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사고라도 나면 잘잘못을 큰 소리를 따집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게 아닌데도 말이죠. 어쨌든 저는 열심히 신호를 지킵니다. 다른 사람이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더라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건넙니다.

코로나 기간의 기본 매너는 아마도 ‘마스크 착용’이었을 것입니다. 실내는 물론이고, 야외에서도 마스크는 기본으로 착용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본인 편하자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종종 미디어에서 마스크 착용 문제로 폭력이 발생한 사례를 보도하기도 했는데, 제가 사는 곳은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워낙 당당해서 뭐라고 지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빤히 쳐다보면, 민망해 하는 게 아니라 ‘뭐? 잘 못됐어?’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애교수준입니다. 무리지어 다니면서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운동할 때는 본인 힘들다고 마스크가 아니라 입스크, 턱스크를 합니다. 이럴 때 마다 영화 『킹스맨』 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입니다.

사실, 기본적인 매너만 있어도 사람들의 다툼은 크게 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본을 갖추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이죠. 고작 2킬로미터 거리를 산책하면서도 매너를 떠오르게 해주는 제가 사는 곳, 무한 자유를 누리는 듯해서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싶지도 않고, 턱스크를 하고 다니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난주부터 다시 교회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성가대도 했습니다. 요즘은 성가대가 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찬양을 하는데, 솔직히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앙 활동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하고, 이제 규정도 완화돼 성가대에 서는 게 부담되지는 않지만,
‘굳이 마스크까지 착용하면서까지 찬양대를 운용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대체로 연세가 많은 분이 모인 모임이니,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나이가 마흔이 넘었으니 저만의 생각을 계속 주장할 수도 없지요. 나이가 든다는 것, 이해할 게 많아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어린 시절보다 마음씀씀이가 넓어졌습니다. 또한 20대 때라면 걸리지 않았을 것 같은 코로나에 걸린 것도 나이 탓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회 일정을 마치고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담임 목사님이 나오십니다. 얼마 전에 부임하셔서 한참 적응 중이시죠. 저는 대구에 내려 온지 7년째를 맞이하고 있고, 목사님은 만 1년이 채 안 됐으니 적응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코로나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저는 지난 릴레이 기도회 당시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네. 어떤 회개를 하셨나요?”
“남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코로나 델타를 보면서, ‘한국 교회가 예배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국가의 방역 지침을 어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막상 아프리카에는 백신이 없어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국 교회는 목숨보다 소중한 예배를 위해서 방역 수칙은 어기면서도 정작 죽어가고 있는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예배가 오직 한국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코로나는 그 시작부터 인재(人才)였습니다. 그리고 그 확산과 변종도 모두 인재였습니다. 병을 세계화 하는 데 성공했지만, 병을 고치는 세계화는 실패했습니다. 아울러 인류가 세계의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확실히 바이러스가 지구의 주인인 듯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세계화이고, 선교이고 예배인지….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방역인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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