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되고 있는 로컬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를 고찰할수록,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세계화 추세가 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해당 시기는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 개최, 북방정책, 해외여행 자유화 등이 이어지던 때라 정책적으로 ‘세계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국민의 관심을 한반도 밖으로 가져갔던 시기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신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북한과의 체제경쟁, 국민에 대한 정권홍보 등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당시 냉전이 극에 달하던 터라 소련(러시아)에서 열린 `80 모스크바올림픽과 미국에서 열린 `84 LA올림픽 등 두 번의 올림픽이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각각 불참한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던 터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도 있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고르바초프가 1988년 초 소련의 서기장으로 취임함에 따라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공산국가의 참여가 이루어지며 세계 최대의 축제가 연출되었다.
이때만 해도 해외여행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외교관, 상사주재원, 유학생, 중동건설근로자 뿐이라 대한민국 국민들이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협소했다. 국가적인 행사를 두고 호기심에 찬 온 국민이 생방송으로 개막식 중계방송을 주시하는 가운데 160개 참가국 선수단이 입장했고,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개막식 슬로건이 선포되었다.
필자는 이 순간이 오늘날의 로컬 개념이 출발한 시작점이라 주장하고 싶다. 당시 올림픽 경기장이 들어선 올림픽공원 인근에 건설중이던 아파트 단지를 올림픽선수촌으로 활용했는데(현재도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라 불림) 올림픽 기간은 물론 패럴림픽 기간까지 입촌부터 퇴촌까지 약 2개월의 시간 동안 이 지역은 160개국에서 모여든 세계인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다양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공연과 전시 등이 펼쳐졌는데, 라스칼라, 볼쇼이 등 클래식 분야에서는 이전까지 관람할 수 없던 유명 공연단이 내한했다. 심지어 일본 대중문화도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초기 아이돌 그룹인 ‘소녀대’가 내한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TV방송에서 일본어로 된 노래를 듣게 되는 진귀한 사건도 일어났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세계(異世界)가 펼쳐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wTDIGkDTTY
◆ 문화적 자긍심이 글로벌보다 가치있는 로컬을 일깨우다
한편 대한민국에 대한 세계인의 반응도 놀라웠다. 한국전쟁 이후 복구된 서울의 풍경에서부터 놀랐지만, 한복, 국악 등을 접하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높은 평가와 관심을 보였다. 여담이지만 해외 문화교류라 하면 사물놀이를 연상하게 된 계기가 형성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1992년 <광동제약> 『우황청심환』 광고 속에서 판소리 명창 故 박동진 옹의 “잘한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추임새가 국민유행어가 되고, 1993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관객 100만을 넘기는 열풍으로 번지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들이 이때 나왔다. 이 시기인 1990년대는 밀리언셀러 앨범이 연속해서 나오며 가요의 황금기를 구가했고, 영화도 예술성과 대중성 면에서 약진하는 등 문화적 자긍심도 어느 때보다 커져 갔다.
같은 시기 벌어진 해외여행자유화와 북방정책도 로컬 세계관 형성에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올림픽을 앞둔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남북한의 왕래와 무역을 포함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발표했고, 이 선언은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로 이어졌다. 1989년부터는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으며, 1990년에는 소련(러시아) 수교, 1991년 9월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 1992년 중국 수교 등 대한민국과 세계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굵직한 일들이 이루어졌다.
◆지방자치제 부활, 글로컬리제이션; 본격적인 로컬 관점의 시작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층은 어학연수로, 중장년층은 비즈니스로 세계의 문턱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항공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측해 인천국제공항 사업추진도 199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 아시아 허브공항이라는 위상을 지닌 세계적인 공항이 되었을 정도다.
필자의 기억과 지식 속에서 이 시기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3가지 아이콘을 꼽자면 첫 번째로 1989년에 출간된 대우그룹 故 김우중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넒고 할 일은 많다』, 두 번째로 1990년도부터 시작된 삼성의 『지역전문가 제도』, 세 번째로 1993년에 출간된 홍정욱 회장의 저서 『7막7장』을 들 수 있다. 이 3가지는 그동안 동경하기만 했던 세계를 향한 진출기록이면서 동시에 현지 상황에 대한 적응기록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는 대한민국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난다. 지방자치제 부활로 1991년에는 지방의원 선거가,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다. 이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시스템이 점진적으로 지방분권화해 나갈 것임을 의미하는데, 지방이 새로운 중심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런 국내외 상황은 이른바 국경의 개념을 넘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인식하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함께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현지의 풍토에 맞추는 지방화(localization)가 혼합된 개념인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을 자연스럽게 터득해가는 과정이었다. 유수의 글로벌 기업의 현지전략을 답습하는 한편, 우리 나름의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기였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에 반발해 바라보는 로컬
그러나 이런 희망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 시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7년 11월에 닥쳐온 외환위기는 세계화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국가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발 빠르게 세계 경제체제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계화’라는 표현보다 ‘글로벌화’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가부도 위기 속에서 외국자본이 들어왔고, 금융자본에 의해 국내경제가 세계경제에 편입되면서 경제주권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보니 이때부터 국내의 정치적·사회적인 담론 속에 금융위기를 겪으며 생겨난 글로벌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글로벌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로컬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국민이 나서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서울올림픽에 이어 대한민국이 가진 공동체 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동시에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대대적인 분위기 전환을 이룩했다.
금 모으기 이외에도 경제를 살리고 자원을 아끼기 위해 우리 상표 애용하기,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품 분리수거 등의 시민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다소 억지논리일 수 있으나, 이런 시민 캠페인은 지역의 유무형적 자산과 가까운 이웃을 발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험이 축적되며 시나브로 이전보다 미시적이고 생활에 밀착된 로컬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사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로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거시적이었다. 글로벌의 상대적 개념으로 해석하다보니 글로벌은 전세계 또는 주류 국가가 형성한 자본주의 체계를 의미했고, 로컬은 국가 단위나 개발도상국 또는 저개발국가를 의미했다.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세계와 더불어 단일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화 과정에서 형성된 로컬 세계관;
보다 협소한 물리적 영역개념과 비물리적인 가상공간까지
한편, 금융위기의 극복 과정에서 다른 차원의 접근을 통해 미시적 로컬 세계관, 비물리적 로컬 세계관이 성립되는 계기가 발생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국가적으로 ‘정보화 산업’에 역점을 두었다. 국가가 ‘3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과 ‘국민PC’ 보급이 이루어졌다. PC방의 등장도 이때고, 네트워크라는 것을 활용하게 되면서 미국 <블리자드>사의 게임 ‘스타크래프트’가 국민 e스포츠로 등극한 때도 이때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도, 회사원들이 업무를 하기 위해서도 초고속 인터넷망과의 접속을 위한 옥내망과 사내망이 필요해졌는데, 이를 랜(LAN; local area network)이라 한다. 즉 인터넷과 PC의 보급이 랜의 활용도를 높였고, 이런 정보화 용어를 사용하는 과정 속에서 미시적 공간, 미시적 영역에 대한 로컬 개념이 익숙해졌다.
이밖에도 정보화의 물결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대중적인 관념으로 형성시켰는데, 이 또한 창작자의 세계관을 공간에 투영시키고, 취향중심의 공간으로서 소비자가 로컬을 인지하게 만드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은 1986년 미국의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서 등장한 표현인데, 원작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허구의 공간에 펼쳐낸 것으로 묘사했지만 지금은 홈페이지, 이메일, 웹하드, 클라우드 서비스, 게임 등 물리적 공간과는 또 다른 다양한 정보와 콘텐츠가 저장되고 통용되는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런 가상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심취하게 만드는 영역은 게임으로, 게임 시나리오와 세계관은 시공간 개념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가상의 공간에 익숙해지고, 가상의 공간을 즐기는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가상 세계의 세계관이 물리적 시공간에서의 삶이 교차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임 속의 용어가 현실에서의 활동을 설명하기도 하고, 게임과 동일하게 현실의 시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일상을 벗어난 취향의 공간을 발견해 그 공간에서 활동하는 행위는 게임과 같은 가상세계의 현세화이며, 새로운 취향공간에서 나타내는 또 다른 페르소나는 게임의 세계 속에서 사용하는 아이디와 캐릭터와 동일하다. 지금은 메타버스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사이버스페이스가 구현돼 나가고 있다. 앞으로도 현실 세계의 로컬을 재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피력된 바가 없는 논리로 필자 혼자 확대해석하는 관점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나 발명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익숙한 것에서 익숙함을 띤 생소한 영역으로 조금씩 옮겨가다 어느새 새로운 개념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거라 본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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