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0여 년 전의 어린 시절,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관련한 만화 영화, 뮤지컬 등이 비교적 자주 방영되고 공연됐던 걸로 기억한다-그러고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잘 언급되지 않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관심이 없어 집중해서 대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소설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품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노출됐기 때문에 톰 아저씨가 죽는 장면은 기억하고 있다.
성장하면서 아프리카 흑인의 아픔을 담은 『뿌리』는 읽었어도, 본 작품은 독서 리스트에 포함하지 않았다. 어떤 해설에 따르면 국내에서 본 작품은 아동문학으로 치부됐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멀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십 대 중반이 넘은 현재 처음으로 읽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흔히 말하는 마음을 울리는 작품임은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으로도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감동의 이야기였다.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먼저 처절한 흑인들의 아픔이 담겨 있는 과거 현실에 대한 인류애적인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가치가 보편화된 현재에서 작품을 읽다보면, 평등의 가치를 보편화하기까지의 역경의 과정이 고스란히 독자의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다음으로 여전히 불평등한 현재가 오버랩 됐기에 허구인 문학 속에 등장하는 노예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인식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은 잔혹성과 그로 인한 비통함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부모와 자녀간의 살인 등과 같은 잔혹한 폭행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소유물로 인간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는 1811년 목사인 라이먼 비처의 일곱 번 째 아이로 태어났다. 당연히 집안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되었고, 외형적으로 작은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성장하면서 흑인 노예의 처참한 삶에 대해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러면서 노예제도의 부조리함을 생각하면서 성장했기에 혁명적인 수준의 본 작품을 쓸 수 있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남북전쟁 발발의 시초가 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1862년 해리엇을 만난 링컨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당신이 이 엄청난 전쟁을 촉발시킨 책을 쓴 그 조그마한 여인이로군요”라고 말 했을 정도였다.
따져 보면 작가가 여성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당시 여성 또한 남성과 비교할 때 적정한 대우를 받는 인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백인 여성 즉, 이등 인류라는 입장에서 흑인 노예의 삶을 좀 더 깊숙이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울러 그녀의 기독교 정신도 노예들의 참혹한 사슬을 외면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작품 중에 예수가 어려운 사람을 멀리 두지 않고 가까이에 불러 치료한 사건을 등장시킨 것을 보면, 작가는 노예들의 삶을 외면하는 것이 기독교적이지 못한 일이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제목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지만, 오두막은 초반부에 잠시 등장할 뿐, 톰 아저씨의 모습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전개는 모든 부분에서 성자와 같은 자세를 취했던 톰과 저항 흑인 조이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톰을 통해서는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조이를 통해서는 부정한 체제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결말 부분에서는 조이조차 기독교에 귀의한다.
작품은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사상을 축으로 전개되며, 좋은 주인을 만나 성장하고 이후 새롭게 만난 주인에게 자유를 얻을 줄 알았던 톰이 악질적인 주인을 만나게 되면서 강압적인 곤욕을 치르다 숨지게 되는 내용과, 악질적인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가족과 재회하고 자유국가인 캐나다로 무사히 도피해 자유인이 돼 신학을 공부하다가 어린 시절 떨어졌던 누나와 만나 해피엔딩을 맞는 조이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바른 해석
당시 미국은 기독교 사회였다. 예수의 사랑, 특히 그리스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얻은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집단을 이룬 국가였다. 그런데 이런 국가에서 유지되고 있는 노예제는 왠지 국가 설립의 의미마저도 부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노예제를 포기하고 모든 노예에게 자유를 선포했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며 미국으로 이주했던 청교도들은 그들이 구대륙에서 찼던 족쇄를 더 무겁고 단단하게 만들어 흑인 노예들의 발목에 채웠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나에게 소중했던 자유가 다른 인종에게는 소중하지 않을 거라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곧 예수의 만인에 대한 구원 사상을 특별 인종에게만 제한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일부 기독교인들은 노예로 태어났으니 자유가 없는 게 낫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교회가 지지하지 않았다면 회개라는 껄끄러운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노예를 해방 시켰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교회가 노예제를 옹호하는 설교를 설파한다. 작품 중에 등장하는 ‘헤일리’라는 노예 상인은 노예들에게 쇠사슬을 채우지 않은 자신을 선하게 여기는데, 이 장면을 보면, ‘인간의 자기모순적인 행위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제도를 만드는 존재는 분명히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완벽할거로 생각하는 오류 속에 기거하고 그 편리성에 취하게 되면, 결국 주객이 전도돼 제도가 인간을 다스리게 된다. 이쯤 되면 인간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던 아이히만을 들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한 그는 오직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작품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기독교 설교자들의 보수적인 견해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가 오직 신의 계시로 서술했다는 작품이기에 기독교인이 아닌 독자가 읽었을 때는 다소 불쾌감이나 낯섬을 경험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보편적인 가치를 적용해 이해하자면 만민 평등사상에 대한 주장이며, 평등이 곧 신의 뜻이기에 더 확고하게 지켜져야 할 가치라는 작가의 주장을 알 수 있다.
같은 성경을 읽었음에도 누군가는 노예를 인정하게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해방을 주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정반대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미루자. 어쨌든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평등을 택했다. 그리고 그 해석이 옳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는 모두 소중한 것이다. 적어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분명 그들의 호흡은 존중받아야할 행위인 것이다. 하물며, 같은 인간인데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이미 ‘사랑’이라는 기독교 최고 계명은 노예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노예제를 두고 발생한 갈등
19세기 초는 인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을 때이다. 흑인은 물론, 여성, 아이들 등 백인 성인 남성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의 인권은 존중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흑인에 대한 인권 인식은 더 일천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조금씩 진보하고 있었다. 남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관점은 갈등관계에 놓였는데,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계급적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률을 다루는 사람들은 흑인의 처우를 생각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 그들이 흑인들에게 동정심을 갖기도 하고, 혹은 좋은 주인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려 할 때 감당해야 하는 정치적 갈등은 굳이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원의원 존’을 보자. 그는 노예제 폐지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 앞에서 구원을 바라는 도망노예를 안전하게 피신 시켜주기까지 한다. 즉,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자비(慈悲)의 문제로 생각하지, 제도적 오류로 인식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정치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예제 폐지를 무시한다. 다시 말해서, 노예계급의 삶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적 오류를 안다고 해도 바꾸는 일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의미다.
다음으로 경제적 문제이다. 노예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노예제 이전에 과거 고대 그리스로 가보자. 그들의 민주주의는 노예제가 받쳐주지 않고서는 시도되기 힘든 체제였다. 이런 그리스의 본보기는 19세기 미국으로 그대로 이전된다.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예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활동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정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정치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 ‘민주주의’ 자체가 평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즉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등을 포기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부조리와 내부적 모순은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우리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등장하는 ‘오두막’은 톰의 고향이다. 한 번 떠나고 나서는 돌아갈 수 없었던 집이었다. 순교, 본향, 파라다이스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누군가의 순교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자유, 평등, 해방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19세기가 아닌 현재를 살펴보자.
현재 대통령의 연설문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자유’다. 다만, 이 자유가 무엇으로부터 자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부익부 빈익빈이 점점 첨예화되어가는 사회에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면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고, 여전히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류에 대한 위로의 말이라면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등을 생각하고 준비한 언어 아니었을까? 그러나 현재 떠도는 자유는 평등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그 가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평등은 자유를 보완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자 했던 자유는 인간의 창의성과 욕망을 극대화 하는 데는 좋은 촉매제로 작용했지만, 공동체를 돌보는 데는 조금 인색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유만을 강조하면 자연스럽게 부(富)를 이루지 못한 자들을 게으른 자나 신의 축복에서 벗어난 자들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도가 일부 기득권층을 향해 존재한 상황에서 자유는 가진 자들을 위한 개념이었지, 절대로 개천에서 태어난 자들을 위한 언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개천에서 태어난 자들을 위한 언어가 바로 ‘평등’이다.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 공산주의가 문을 닫았으니, 이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기회의 평등정도는 보장해야 한다는 게 평등주의자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을 장악한 자들은 평등을 보장하더라도 서서히, 조금 더 시기를 늦춰야만 했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여러 꼼수를 통해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는 꼼수를 부렸다-자녀들의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언론탄압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탄압이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탄압이라고 외칠 자유가 있는 세상이 된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평등은 가진 자가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할 때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본 작품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다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비록 성경을 이상적 가치의 근거로 삼으려는 작가의 심사숙고가 사회과학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을지라도, 문학이라는 장르를 매개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시도는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노예제를 유지하는 모순된 현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이후 남북전쟁으로 인한 10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많은 인명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은 존재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국가의 해방을 위해 수많은 독립군이 죽었지만 여전히 친일의 잔재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역시 민주주의를 탄압했던 잔당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 사실, 이런 부조리함조차도 수용하는 게 자유, 평등, 민주주의이다. 그러니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런 혼란을 이겨내면서 발전해 나가는 게 민주주의의 숙명이다. 그러다가 발전이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는 와해되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톰 아저씨가 돌아 갈 수 없었던 ‘오두막’은 결국, 이 땅에 천국은 없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좋은 말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이런 가치들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늘 시끄러운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작가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통해 폭력과 희생 없이는 발전하기 힘들었던 과거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의 혼란도 결국 발전을 위한 전주곡으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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