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는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전위적인 작품을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여서 그런 것일까? 작품은 길지 않지만, 난해하다. 이런 난해함은 기존 형식을 파괴하는 작가의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난해함이 ‘이해 못함’ 혹은 ‘뭐지?’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작가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학의 분위기는 기존에는 감히 언급하기 어려웠던 주제를 다루기도하고, 파격적인 형식의 작품도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생소함을 20세기 마인드로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나조차도 기존의 완성도 있는 플롯을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고 있으니, 작품의 분량과 상관없이 생소한 형식의 작품은 쉽게 독해하지 못한다.
◆인종청소를 지지했던 작가에게 수여한 노벨문학상
기존 관념을 철저히 능멸했던 작가가 인종청소를 옹호했다는 것은 좀 특이하다. 그는 유고 연방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키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옹호했고, 코소보 내전 당시에도 NATO의 공습을 반대했다. 그가 자기 어머니 출신을 고려했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주의자들에게 주로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그의 작품 활동과 정치적 발언은 조금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이 정치적 색깔론에서 벗어나 작품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기에 한트케의 수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노벨문학상이 정치적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혹여 그런 색깔론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대중들이 나서서 색깔론을 가지고 비판한다. 한트케의 수상을 이중 잣대로 비판하는 일부 평단이나 대중들에게 ‘수상모독’으로 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틀을 모멸적으로 전복한 작품
『관객모독』을 읽기 시작하면, 분명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단, 거기까지 만이다. 작품은 배우들끼리의 역할극으로 이어지지 않고, 관객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좀처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계속 쏟아 놓는다.
“그들은 말을 하지만 관객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들끼리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관객을 향한 메시지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는 것일까? 대화, 독백, 방백 등 모두 관객들이 듣는 연극의 대사 전달 방법 아닌가? 그런데 작품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급기야 관객들에게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다.
“혐오스런 상판대기들아, 어릿광대들아, 눈딱부리들아, 가련한 몰골들아, 뻔뻔스러운 작자들아, 오락실 사격장의 허수아비들아,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사실 이 정도는 애교수준이다. 작품 말미로 가면, 더 심한 욕설로 퍼붓는다.
그리고 막이 내릴 때쯤에는 “스피커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우레 같은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라고 하면서 배우가 아니라 관객들을 향한 찬사를 보낸다. 관객들이 배우의 연기를 본 게 아니라, 배우가 관객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질타한 듯한 느낌, 그런 모욕감을 인내한 관객들을 향한 찬사.
이런 파격적인 형태의 작품이 작가로서 먹고 살기 위해서 쓴, 첫 작품(1966년)이라고 한다. 당연히 실패할 거 같았는데, 초연부터 극찬을 받았다.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관객들이 있기에 새로운 형태의 작품의 가치가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은 길지 않다. 번역된 작품도 채 100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길지 않으니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읽어도 될 만큼 짧은 작품이다. 다만, 나에게 하는 듯한 심한 욕을 여러 번 되풀이 읽어야 한다는 게 거슬릴 수 있다.
◆누가 연기를 한 것이고, 누가 연극을 본 것일까?
연극을 볼 때를 떠올려 보자. 앞에는 무대가 보이고, 관객은 층층이 이뤄진 객석에 앉는다. 막이 열리고 조명이 켜지면서 배우들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들이 나와서 관객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말을 한다.
관객들은 당연히 배우들의 대사에 집중한다. 그런데, 왠지 나를 향해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배우들은 그렇지 않다고 공공연한 대사를 던진다. 연극 속에서 배우들이 뭔가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배우들이 관객들을 지켜보면서 이야기한다.
잠시 후 관객석이 술렁거린다. 작은 소리로 “뭐하자는 거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갑자기 객석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배우들이 관객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고 쳐다보면서 모욕을 준다. 어떤 관객은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태세다. 같이 온 연인이 그를 붙잡는다. “이건 연극이라고!” 상황을 이해한 남성은 ‘그래, 연극이야!’라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애써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점입가경이다. 기존 극에서 볼 수 없었던 행동과 대사가 계속 이어진다.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왔던 노부부 한 쌍은 “이건 연극이 아니잖아!”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한다. 퇴장하는 노부부를 보던 한 배우가 “역시 꼰대들은 안 돼!”라고 말하며 히죽거린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 90분을 채운다. 그리고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 관객들을 대신해서 스피커에서 울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그리고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아무도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이후 배우들이 다시 등장해서 인사를 하는데, 습관적으로 한 관객이 손뼉을 치자 모든 관객이 따라서 손뼉을 치며 휘슬을 분다. 도대체 누가 연기를 한 것이고, 누가 관객이 된 것일까?
◆진짜 『관객모독』이었을까?
작품은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배우와 관객의 경계, 무대와 객석의 경계 등을 모두 지워버렸다. 아울러 관객은 대우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념도 소멸시켰다. 심지어 감동, 카타르시스 등을 느끼지 않아도 박수 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관객모독’이지만, 여기서 ‘관객’은 기존 관념이라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틀에 박힌 일방적인 전달과 수용. 작가는 이러한 일방적인 전개를 전복했다. 그리고 단순히 배우와 관객의 전도가 아니라, 배우와 관객의 구분을 없애서 모두 극으로 끌어들였다. 기존 연극에 대한 관념을 지우면서 작가는 쌍방향적인 극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쌍방향적인 연극의 좋은 점은 알 수 없다. 그저 새로운 시도, 새로운 형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작가의 이후 행동을 볼 때도 그는 기존 관행을 일관성 있게 비판하며 실험을 추구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존 것을 무시하고 올라서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관성에 사로잡힌 우리의 인식, 행동, 바람 등을 철저히 능멸해야 했다.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타협이 아니라 전복만이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국민모독”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공직자가 선출됐다. 그러니 현재 활동하는 공직자 대부분은 그야말로 ‘신삥’이다. 나는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고, 좌파나 우파를 따질만한 명확한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공직자들 대부분은 그런 선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수많은 국민은 표를 주고 이들을 선출했으니, 이들이 배우가 되고 국민은 관객이어야 할 듯한 데 선출해 놓고 나니, 국민을 ‘졸’로 보고 있다. 그야 말로 ‘국민모독’인 셈이다. 전 국민을 상대로 듣기 평가를 실행하기도 했고, 분명 범죄 사실이 있을 듯한데, 여야를 막론하고 깨끗하다고 주장한다. 고위 공직자가 더 큰 범죄를 저질렀는데(대표적으로 50억 클럽), 무죄가 나온다.
장발장은 빵 한 덩이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에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국민은 이러한 황당한 연극을 보면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작금의 충격적인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국민을 대상으로 정치인들이나 유명인들은 계속 국민이나 팬을 희롱하고 속이고 가스라이팅한다. 그야말로 ‘국민모독’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해결책이 있을까? 현재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수를 늘리자고 주장했다가 대구광역시장한테 한 소리 들었다. 80명만 있어도 충분한데, 왜 국회의원을 더 늘리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행정부 수장도, 야당의 수장도, 국회의 수장도 모두 국민모독에 앞장서는 데 최선을 다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국민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박수를 쳐주고 있다. 한트케는 배우와 관객의 구분을 없앴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지웠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이상 국민을 모욕하는 사람을 선출할 이유가 없다. 국민이 못 넘을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기술적으로 충분히 대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시대다. 혹은 의도적인 무관심으로 정치적 제도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90% 이상의 유권자가 투표하지 않는 행위 등.
그러나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까지 너희들이 그 따위로 노는지 두고 보자!”라고 하면서 역으로 모욕할 준비를 하는 국민성이 있어서일까? 경계가 희미해졌다. 굳이 선을 그어 놓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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