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에 태어나 1948년에 스스로 운명을 달리한 일본 작가다. 작가들이 스스로 생명을 조절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다섯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작가는 오사무가 유일하지 않을까? 왜 그렇게도 삶을 등지고 싶었을까?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했다고 한다. 누구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싶어 하는 데, 작가는 왜 그런 혜택조자도 스스로 거부하고 고뇌했을까?
본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석 장의 사진 속 인물에 대한 느낌으로 시작하는 본 소설은 요조라는 사람의 유년기, 학창시절, 청년기와 관련한 세 가지 수기가 본문을 구성하며, 후기 형태로 마무리 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여느 도련님처럼 우쭐해 하면서 살지 못했고, 생각하는 대로 혹은 느끼는 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도 못한 요조의 삶을 다룬다. 그의 삶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의 삶은 철저히 위장된,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익살’스러운 삶이었다.
요조는 모든 사람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특히 여성과 어울리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느꼈음에도 그의 외모와 분위기 때문에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사실혼으로 함께 살기도 한다. 만난 여인들도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요조는 같이 살 던 여자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나 혼자 살아남아 자살방조죄로 기소되었다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고, 이후에 딸아이와 함께 살던 여인과 같이 살지만 스스로 그들의 행복을 망친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도망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산 여인은 요조 눈앞에서 강간을 당하지만,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후에 약물에 중독된 요조는 정신병원에 끌려가고, 그 곳에서 스스로 ‘인간 실격’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시 자살을 시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익살’이 주는 의미
익살스럽다는 뜻은 결국 타인과 관련한 말이다. 내가 익살스럽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타인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익살스럽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익살을 위해서는 오버 액션이 필요하며, 탄탄한 각본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을 웃길 수 없기 때문이다. 깔깔대며 즐기는 코미디 프로그램 모두가 철저한 각본에 따라 진행된다는 사실을 시청자들도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우리는 웃는다.
그러나 요조의 익살은 다르다. 각본대로 진행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요조가 그런 각본을 짜서 익살을 연기하는 줄 몰라야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을까? 요조의 삶은 엉망이었고 그 결말도 자살이었지만 그의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알콜 중독, 여성편력, 니코틴중독, 약물중독 등 좋지 않은 삶의 습관이 있었음에도 ‘익살’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이미지로 그는 요조라는 인간 원래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이유는 온전한 ‘요조’라는 인간으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낳아준 부모도, 피를 나눈 형제도, 함께 살았던 여인들도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진짜 요조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이런 점에서 요조는 도대체 누구로 산 것인지 알 수 없다.
◆마르크스, 예수 : 닮은 듯, 닮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이라고 표현한 학자가 있을 정도로 닮은 듯 닮지 않았다.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형태를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꿈꿨던,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산주의 세상’이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과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지상에서의 천국이고 후자는 죽은 후의 천국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서민의 종교를 지향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당시 기본에서 벗어난 기독교를 비판한 것이지, 본질적인 부분은 오히려 크게 다르지 않은 관점으로 모방했을 뿐이다. 이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로 바뀐 것을 보면 기독교 역사의 데쟈뷰가 아닐까? 어쩌면 현세, 내세 어느 쪽에 관점을 두는 가에 따라서 두 사상은 쉽게 오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조는 잠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모임에 참여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령을 수행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심취하지 않는다. 유복한 태생을 스스로 비판해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론만 존재하고 행동이 보이지 않는 사상에 매력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마르크스주의도 그가 익살스러운 이미지를 택한 것처럼 하나의 선택지가 됐을 뿐이다.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가 민중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잠시 머물다가 나온 후에 요조는 잠시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요조는 종교에 귀의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인물이었을까? 종교 역시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거처가 아니었다. 신에 대한 사랑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두려움만 느꼈던 요조에게 기독교의 천국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지옥만 보였을 뿐이었다. 두 극단의 사상과 종교를 오가면서 그는 어느 것에도 안착할 수 없었다.
◆“세계는 개인들”이 아니라 “세계는 개인”임을 깨달았다
‘개인들’은 집단 혹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은 그야 말로 혼자이다. 왜 요조는 집단이 아니라 세계는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집단에 속해 있어도 자기 자신 그대로를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고, 학창시절에는 다른 교우들의 눈치를 봤다. 이후 성인이 돼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요조’라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익살’의 이미지를 잃기 싫어서였을까?
어쨌든 그는 ‘혼자’라는 느낌을 계속 인식하며 살아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혼자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솔직한 자아로 살아갈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그야말로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의 자아이다. 술, 담배, 여인, 약물에 의존하다가 정신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스스로 ‘인간 실격’, 즉 인간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쯤에서 독자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왜 정신 병원에 갇힌 후에야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자유를 잃어서? 정신 병원 자체가 정상적인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어서? 아니면 익살이라는 포장의 효과가 다해서? 답은 다양하게 나올 듯하다.
나는 그의 익살이라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그가 타인에게 보여졌던 이미지는 ‘익살’은 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그의 가공적 이미지가 빛을 잃은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그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럴 능력도 없었고, 정신 병원에서 뭘 더 할 수도 없었을 듯하다.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없었다. 평생 굳혀온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잃게 된 자유, 이미지의 파괴. 그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본질이란 전혀 없었던 그의 방향추도 어느 한 쪽을 가리키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미지로 살아가는 시대
『인간 실격』은 익살이라는 이미지로 살아 온 요조가 그 이미지를 잃게 되면서,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을 현대에 적용해 보자. 현대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정치인도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하며, 기업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매출에 문제가 생긴다. 많은 SNS도 진실보다는 이미지가 중요하고, 성형도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일 수도 있다. 솔직한 ‘나’가 아닌 만들어 진 ‘나’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어느 덧,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이 됐다.
다시 떠오르는 단어가 ‘시뮬라지옹’이다. 가상이 실재를 넘어서는 세상. 그러다 보니, 이미지를 실추한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오해가 있어서, 혹은 진실이 드러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면피라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작품의 주인공 요조는 ‘인간 실격’을 느끼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단 한 번도 ‘나’로서 살아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에게 안타깝지만 어울리는 결말이다. 이미지는 만들어 가는 것이다. 원래부터 존재한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에 억눌려 살다 보면, ‘나’를 잊어가는 독에 중독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게 현대인들의 문제점이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당장 주어진 상황에 나에게 부여된 일들을 묵묵히 하면 된다. 그러다가 공부를 잘 하면 우등생 이미지가 생기고, 일을 잘하면 능력 있는 자의 이미지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만들어진 좋은 이미지는 조금의 실수 정도는 눈감아 주게 하는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좋은 이미지를 계속 구축해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듯이 “세계는 개인이다.” 누구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를 발견하면서 동시에 성숙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미지와 본질이 전도되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우수한 성적을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생, 운동선수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성취를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지를 위해서, 그것이 본질인 줄 착각해서 계속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펑! 하고 터지면, 끝난다. 그리고 그 결말은 죽음이거나 그에 근접한 또 다른 무엇이 된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무던하게 노력한다. 그러다가 안 되면, ‘실패’라는 두 글자와 함께 ‘실패자’라는 자포자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특별한 이미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켜야 할 이미지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살 수 있고, 역설적으로 이미지를 포기해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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