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백색 소음이라고도 불린다. 뜻을 찾아보면 “백색소음이란 넓은 음폭을 가지고 있어 귀에 쉽게 익숙해지는 소음”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잠 잘 때나 명상할 때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소음이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화이트 노이즈’라고 했을까? 작품을 읽다보면 중간 중간 광고 같은 문구가 나오는데, 마치 PPL을 보고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즉 ‘화이트 노이즈’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게 되는 미디어 속 메시지, 어딜 쳐다봐도 눈에 들어오는 광고문구 등을 의미 한다. 1985년에 출간어 작품이 나온 지 약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쩌면 미디어의 다양한 소음에 노출돼 있는 지금의 상황을 예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돈 드릴로는 1936년에 이탈리아 이민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토머스 핀천, 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포스트모던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실제로 『화이트 노이즈』가 다루는 메시지도 포스트모던적이다. 대체로 현대 사회의 문화를 통찰하면서 주로 미국 사회를 다룬 작품을 썼다고 한다. 특히 지적인(교수 등)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동시대 주요 이슈를 잘 다뤘다고 하는데, 특히 이러한 그의 재기(才氣)는 9·11 사태 이후 부각 됐다. 본 작품도 주인공이 대학교수인 점을 볼 때 그의 인물 설정 공식이 적용됐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어이없게도 ‘잭’은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히틀러 연구가이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여러 번 결혼했고 현재의 아내인 ‘바바’도 그가 첫 남편이 아니다. 함께 사는 자녀들 역시 서로 다른 부모를 두고 있다. 특이할 것 없는 일상적인 미국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어느 날 갑자기 유독가스가 공중에 유출돼 잭의 가족은 피난을 떠나게 되고, 그 와중에 잭은 2분 30초 동안 유독가스 구름에 노출된다. 이후 그는 유독가스 노출로 인해 몸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아내인 바바도 평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겠다고 ‘다이러’라는 약을 구해 먹게 된다. 그 과정 속에 그녀는 원치 않은 성관계를 갖게 되고, 이 사실을 잭도 알게 된다. 아내와 정사를 치른 남자에 대한 질투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치료약 다이러를 소유하겠다는 욕심으로 잭은 수소문 끝에 바바가 만났던 남성을 찾게 되고, 복수를 다짐한다. 장인으로부터 우연히 얻게 된 총으로 남성을 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남자의 손에서 격발된 총탄에 관통상을 입는다. 이후 복수를 다짐했던 남자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화이트 노이즈의 유비쿼터스(ubiquitous)화
화이트 노이즈는 익숙한 소음이다. 소음이라는 의미는 부정적이지만, 화이트 노이즈는 예외다. 오히려 익숙한 소리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화이트 노이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복시켜 반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끊임없이 재잘대는 타블로이드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등 미디어에 노출돼 어느덧 무의미한 정보-특히 상업적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는 현대인을 비꼬고 있다.
1985년에는 유비쿼터스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주로 컴퓨팅의 편재(偏在)함을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화이트 노이즈에 유비쿼터스라는 말을 사용해도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화이트 노이즈가 만연해 있으며, 오히려 우리 주변에 화이트 노이즈가 없는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언제,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는 공기나 물 등과 같은 필수적인 품목이 아닌데도 쓸데없는 정보들이 우리를 꾸준히 자극하다보니,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한다는 생각할 수도 있다. 반복 노출되는 광고에 우리의 뇌가 반응하고, 결국 우리의 손이 지갑을 열어 소비하게 되는 우리 행태를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는 의미는 결국, 어떤 이미지에 대한 관성적 반응이나 세뇌를 통해 소비행위를 불러 일으킨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죽음
잭과 바바는 둘 다 어느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바바는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해 우연히 보게 된 광고에 홀려 자발적 실험 대상이 된다. 실험 약품인 다이러를 복용하는 데, 여러 부작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바는 기꺼이 임상 실험대상이 된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후 유독물질 구름에 노출돼 언제 그 반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잭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다이러를 구하기 위해서 개발자를 찾아간다.
작가는 19세기 유럽의 최고 시인 중 한 명인 릴케(*필자 주; 시인이 살았던 시기는 포스트모던을 앞둔 시점이었다)의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라는 구절을 철저히 무시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죽음, 당연히 공포의 대상이 아닐까? 본인이 부상을 입힌 다이러 개발자와 함께 찾아간 가톨릭 병원에서 그는 수녀조차도 내세를 믿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구원이라고요? 구원받는 게 뭔데요? 여기 와서 천사에 대해서 말하다니 이런 멍청한 사람을 봤나. 내게 천사를 보여줘 봐요 한번 보고 싶구먼.” 『본문 중』
종교인들조차 내세를 믿지 않은 시대에서 작가는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고, 즉흥적으로 흘러가고, 절대 진리가 사라진 현대에서 삶은 불완전하고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전달한다.
◆시뮬라지옹을 넘어서
장 보드리야드의 ‘시뮬라시옹’이 떠오른다. 이미지가 ‘실재(實在)’보다 더 실재 같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작품 속 세상 역시 다르지 않다. 무심코 내 뱉는 “라디오에서요”, “텔레비전에서요”라는 표현은 어떤 현상의 근거를 명확하게 따지지 않고 미디어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하는, 다시 말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비춰준다. 과학적 사실이나, 진실을 토대로 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루머로 형성된 이야기가 오히려 진실로 와전되는 상황들을 보면, 분명 허구가 실재를 지배하는 세상이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혹은 극복하는 게 맞을까? 그냥 실재는 무시하고 좋은 이미지로만 가득한 ‘매트릭스’에서 거주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문학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라고 말할 뿐 어떤 지침을 주거나 자세한 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작품 속 주인공 잭 교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약도 죽음이 오는 사실을 멈추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이미지에 불과했을 뿐이다.
결국,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미지를 찾는, 현실의 참혹함을 피해 행복한 매트릭스 속에서 안주하는 영화 속 인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진실과 이미지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왜곡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왜곡된 이미지가 나의 삶에 행복을 준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미 오류의 주요요인 중 하나가 자기만족을 위한 심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만족, 혹은 자극을 주기 위한 장치로 재구성돼 있다.
정치인의 모습, 경제인의 모습, 연예인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만들어진 이미지에 열광하고, 사실을 애써 부인한다. 그러다가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을 때, 한참을 거부하다가 더 열정적으로 안티(anti)로 돌아선다. 사실을 보여주지 않은 자의 잘못도 있지만,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대중들의 오류도 분명 문제다.
현실이 어려워서 만족할만한 이미지를 찾아 헤매는 게 현대인이다. 정치도 양당의 차이가 크게 없지만, 뭔가 다른 점을 찾으려고 현미경을 가져다가 깊숙이 관찰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다른 점을 발견하면 “유레카!”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소신이 맞았음을 기뻐한다. 연예인에 푹 빠져 사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의 가공된 삶을 동경하는 것이지, 그들이 놓인 현실이나 그 과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보여 지는 것에만 심취한 것이다.
‘화이트 노이즈’가 익숙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즉흥적인 삶에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쇼핑할 때의 즐거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즐거움, 화려한 것들을 볼 때의 황홀함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독에 대해서 비판만할 수도 없다. 현실이 참혹한데, 그대로 직시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마약이라도 없다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잠시 내세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종교인조차 거부한 내세 역시 이미지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깐다.’ 나 역시 10년 전쯤이었다면 허상에서 벗어나 실재를 찾으라고 주장했겠지만, 강산이 변할만한 시간이 흘러서 나도 변해서 그런 걸까?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참혹한 실재를 찾아서 부정적인 현실을 알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좋은 이미지를 받아들이며 행복한 일상을 살아 갈 사람도 있을 듯하다.
내세를 믿으며 최대한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 중에 대다수 사람은 도덕적이지 않지만- “더 위대한 죽음이 뒤따르겠지. 더 효율적이고 상품화된 죽음이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현실의 긍정적 이미지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혹, “신은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 또한 종교적인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화이트 노이즈’를 거부해야 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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