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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읽어보기(7)] 노랑무늬영원: 사랑이 죽는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4.12.10 15:05 의견 0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앞서 소개한 『디 에센셜 한강』은 한강의 단편 소설 2편과 시, 산문을 모아 둔 것으로 한강을 쉽게 읽어보기 위한 소개서 같은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단편을 통해 작가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 의식을 훑어볼 수 있는 책이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은 대체로 대다수 작품에 작가의 주요 주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서 헤르만 헤세 같은 경우, 항상 이성과 감성의 대립을 다뤘고, 아니 에르노와 같은 작가는 개인의 욕망을 터부시하는 사회적 관습의 폭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한강은 어떤가? 죽음, 삶, 폭력, 회한 등의 정서를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고 있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정서적으로 편안하지 않다. 완전히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긍정적이지도 않다. 느낌은 우울하다. 에너지를 업시키기보다 다운시키는 작품이 대다수다. 본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이렇게 죽음을 다루고, 희망을 보여주지 않은 것일까? 그건 독자가 해석해야 할 문제다.

◆죽음이라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덴마크의 철학자 쇠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절망은 ‘신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멀어짐이 절망”이라고 한다면, “불신자들에는 죽음이 절망”이 될 것이다. 절망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한다. 죽은 자가 말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절망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단편 속에 본인만의 넋두리를 한다.

“형편없는 것을 쓰는 일에 긴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어떤 글을 썼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작가로 등장하는 화자도 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작가에게 글은 곧 생명의 연장이다.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글을 썼는데 형편없다면 그 시간을 죽인 게 된다. 작가는 다시 글을 쓰던가, 아니면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강 작품 모음집 중 가장 긍정적인 글들의 묶음인지도 모른다. 작품들은 죽음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말하기도 한다.

한강 작품에서 드러내놓고 사랑을 다룬 작품은 많지 않다. ‘연민’은 있어도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조금 특이한 작품들이 있는데, 결론은 죽음으로 간다. 죽음은 끝이자, 절망이다. 내년을 기약하기 위해서 겨울에 생명을 다하는 식물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썼다면, 죽음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뀐다.

◆죽음을 극복하다

“그들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한강에게 죽음을 요구한 사람들이 누굴까? 혹은 화자에게 죽음을 요구한 사람들은 누굴까?

한강의 작품은 진보를 말한다. 노벨문학상 자체가 진보로 향하는 작가에게 주는 상이니까,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시대를 비판하고, 권력을 비판하고, 사회를 비판한다. 작가의 글에는 문학계에 만연한 권력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폄훼하는 사람이 있다. 부러움일 수도 있다. 혹은 작가를 여전히 애송이로 생각하면서 느끼는 시기 질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강이 아니면 누가 받을 수 있었을까? 외국에 한강 작품만큼 알려진 작품이 있을까? 작가에게 죽음을 요구한 권력에 맞서 작가는 “나는 죽지 않겠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 선언이 수상자로 만들어 준 건 아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왼손의 항거 : 약자의 반란, 죽음

작품 중 『왼손』은 한 은행원의 정신적 불안과 그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줄거리만 본다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은행원의 우발적 행동으로 인한 사회적 매장, 결국 죽음을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말한 폭력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왼손’은 개인의 욕망을 말한다.

솔직한 개인의 심정이다. 괴롭히는 상관을 향한 주먹질일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칼부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결국 왼손은 자신을 찔러야만 했을까? 여전히 사회는 부조리하고 집단의 권력이 개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항거하는 외손은 결국 자신을 찌른다.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그대로 관망하지 못하는 사회의 폭력,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관습은 사회 변화의 어려움, 그리고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현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왼손의 항거조차 없다면, 세상이 변화할 수 있을까? 개인은 여전히 약하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조국 미국을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전한다. 그 개인이 많이 모여야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리가 모이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나이 든 석학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반란은 모조리 진압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죽음

첫 작품부터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다룬다.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지인에 대한 애정과 슬픔을 이어서 작가는 연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토로한다.

“특별히 다정했을 때는 헤어진다는 것이 싫어서, 유일하게 헤어지는 이유는 죽음뿐일 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했던 적도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죽음을 다룬다. 사랑할 때, 연인은 헤어짐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 둘을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붙어 있는 게 죽기보다 싫을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열정 앞에서 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을 소유할 수 있는 거지. 앞뒤의 맥락은 지워지고 그 말만 기억에 새겨져 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이해한다.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흔히 들었던 성경 구절을 이해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랑은 가능성이다. 앞으로 두 사람을 더 연결해 줄 수도 있고, 혹은 그 사랑이 메마르면서 둘을 갈라놓게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메마름으로 정리가 된다. 건조한 관계, 우리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꾸역꾸역 살아간다.

작가는 고린도전서를 인용하면서 사랑을 강조한다. “사랑이 있어야 울리는 꽹과리도 천사의 말처럼 들린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반어법이다.

그 사랑이 사라지면, 나는 귀를 막아야 한다. 그 사람을 보면 산이라도 옮길만한 힘이 솟을 것 같았지만, 메마른 사랑으로는 상대를 밀어낼 힘조차도 없다. 작가는 사랑을 하나의 죽음으로 이해한 듯하다. 사랑이 끝나는 시점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 메마른 시점, 그 순간이 바로 사랑의 죽음이다. 그리고 곧 현실. 그 현실은 다시 죽음,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생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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