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닮은 한반도의 동쪽 끝,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동네. 호랑이의 꼬리 부분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호미곶'은 유명한 일출 명소다. 상생의 손 사이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일출을 기대하며 하나, 둘 모여든 관광객들과 함께 포항 호미곶에서 열네 번째 여정이 시작된다. (KBS 소개글)
포항 호미곶은 우리나라 일출 명소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번째 이야기는 이 호미곶의 일출과 함께 시작했다. 이른 새벽 그 일출의 사진으로 마음속으로 담기 위해 호미곶을 찾은 이들에게 동해바다는 멋진 일출의 장면을 선물해주었다. 호미곶 일출을 더 유명하게 해준 손 조형물, 그 조형물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갈매기는 일출의 장면을 더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호미곶의 일출로 시작한 여정은 새벽 버스와 함께 동해의 황금 어장의 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 구룡포항으로 향했다. 추적추적 비와 눈이 섞여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구룡포항은 새벽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선들의 수확물들의 경매하는 북적임으로 가득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구룡포항은 늘 그렇듯 북적임에 활기를 더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구룡포항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특산물을 대게였는데 우리나라 대게 생산의 상당 부분을 이곳에서 담하고 있다고 했다. 구룡포의 대게는 독도 인근 해상까지 가서 조업을 해야 하는 힘든 여정을 거치고 있었다. 2월과 3월의 대게는 살이 더 차고 맛이 좋아 찾는 이들이 더 많은데 경매 후 대게들은 빠르게 타지고 실려 떠났다.
이른 아침의 시끌시끌한 풍경을 뒤로하고 구룡포 항은 잠시 동안의 침묵에 빠졌지만, 인근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의 작은 어선들은 그 틈에 쉼 없이 항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그 어선들 중에 노부부가 함께 하는 어선을 만났다. 이 노부부는 27년 동안 작은 어선과 함께 조업하며 생계를 꾸리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일이 힘이 부치기도 하지만, 바다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부부에게 바다는 항상 고맙고 감사한 존재였다.
이 부부는 지금도 바다에 나가 그 바다는 주는 수확물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바다에서 잡아온 문어로 만든 라면은 고단한 일상을 즐겁게 해주는 큰 선물과 같았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듣고 느끼며 발걸음은 구룡포항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거대한 바위를 끼고 만들어진 오래된 식당과 만났다. 이 식당은 1936년 지어진 건물로 애초 이 바위는 바닷속 거대한 암초였다. 일제시대 구룡포 일대가 동해 황금 어장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곳으로 와 경제활동을 했고 구룡포를 지키던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양지바른 좋은 땅에 건물을 짓고 그들만의 마을을 형성했다. 그곳에서 밀려난 주민들은 바다를 메워 그들의 터전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거대한 암석을 끼고 만들어진 건물들은 그 산물이었다. 지금은 특이한 장면이라 할 수 있지만,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구룡포의 아픈 역사는 구룡포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 주변의 비석에도 담겨있었다. 이 비석에는 애초 구룡포항을 만드는데 일조한 일본인들의 공적을 기려 그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이곳 주민들은 그 비석을 시멘트로 덧씌우고 주민들의 이름을 다시 새겼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일제시대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기억을 지워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평화롭기만 한 구룡포항이었지만, 그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무거운 마음은 안고 동네 더 안쪽으로 향한 여정은 재미있는 문패들이 걸려있는 오래된 집들로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 문패에는 집 주인들이나 가족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캐릭터로 만들어 특색 있게 그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문패는 포항시에서 추진하는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구룡포 주민들의 집에 설치 중이었다. 수십 년간 이 구룡포를 지키는 주민들에게는 작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마을을 내려와 발걸음을 구룡포 시장으로 향했다. 지역의 수산물을 판매하는 시장 한편에는 아버지 일을 도와 뻥튀기 일을 하고 있는 대학생 뻥튀기 장수와 그 옆에서 3대가 강정을 만들고 있는 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대학생 뻥튀기 장수는 방학기간을 이용해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솜씨가 매우 능숙했다. 강정 가게는 할아버지와 그 아들, 손자가 함게 일을 도와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강정 가게를 시작한 할아버지는 과거 서울에서 나름 성공한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업이 기울면서 자신과 연고가 없는 구룡포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구룡포에서 재기를 위해 여러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모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의 흐르면서 이곳에 정이 들고 하면서 구룡포에 정착했다고 했다. 이후 이는 이 강정 가게를 통해 자식들을 키우고 지금도 지역에서 알아주는 가게로 운영하고 있었다. 힘겨운 삶의 여정 끝에 찾는 구룡포였지만, 지금 그는 아들, 손자와 함께 행복한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구룡포 강정 가게의 훈훈한 장면을 뒤로하고 여정은 잠시 지역의 명소인 호미반도 둘레길을 걸어 구룡포의 또 다른 명소로 향했다. 그곳은 52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수공장이었는데 이 국수공장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젊은 시절 시작한 일을 과거 방식 그대로 유지하며 일하고 있었다. 이제는 80살이 넘어 일이 더 힘들지만, 그 할머니는 평생의 업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쉬시라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만의 노하우로 바다의 해풍에 자연 건조하는 국수를 만들고 단골가게에 판매하고 있었다. 아마 돈을 벌려고만 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할머니의 단골 식당에서 진행자는 구룡포의 50년 역사가 응축된 양은 냄비국수와 찐빵, 단팥죽을 맛볼 수 있었다. 50년이 넘은 국수공장의 국수와 역시 50년이 넘은 식당의 손맛이 어우러진 찐빵, 단팥죽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50년이 함축된 맛을 느끼며 여정은 구룡포의 일몰과 함께 마무리됐다.
구룡포는 이제 과거와 같은 영화는 아니지만, 여전히 동해바다의 특산물과 만날 수 있는 항구였다. 일제시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고 수십 년간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함께하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을 찾게 된다면 잠시 스쳐가는 관광지만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여러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꿋꿋하다 포구마을 - 포항시 호미곶, 구룡포]
□ 천혜의 절경을 품다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한반도 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형태의 호미반도, 그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옥빛 바다와 마주한 산책로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호미곶 해맞이광장에서부터 연오란·세오녀 테마파크까지 조성된 해안 둘레길. 해안 둘레길의 시작점인 선바우 데크 앞에 선 배우 김영철은 세월의 풍파에 깎여나간 바위를 등지고 보는 맑은 바다 풍경에 감탄을 자아낸다. 가장 포항다운 바다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을 배우 김영철이 직접 걸어보며 봄을 앞둔 마지막 겨울 바다의 운치를 두 눈과 마음에 담아간다.
□ 전국 최대 대게 생산항
구룡포 대게 경매장 호미곶에서 일출을 보고 버스로 2-30분가량 달려 닿은 구룡포항. 요즘 구룡포는 대게잡이 배들로 가득하다. 전국 대게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구룡포는 인근 지역 상인들이 모두 경매를 받아 수조 차로 실어갈 만큼 대게가 풍년이다. 대게 경매장 왁자한 소리에 이끌려 경매장을 찾아간 배우 김영철. 경매장 옆 바로 낙찰받은 대게를 생물 혹은 쪄서 전국 각지로 택배로 부치는 상인들에게서 좋은 대게 고르는 법을 전수받고, 살이 통통하게 올라 달큰함이 가득한 대게 다리 살을 맛본다.
□ 고래가 잡히던 시절부터 구룡포에서 한평생
문어잡이 부부 동해의 숨은 곳간 구룡포. 큰 배들 사이로 작고 낡은 배가 눈에 띈다. 바로 문어를 잡는 중년 부부의 배다. 10대 시절부터 고래잡이배에 올라 20년이 넘게 고래잡이로 살아왔다는 남편. 세월이 흘러 고래잡이가 끝나고 작은 배 한 척을 장만해 아내와 27년간 문어잡이로 살고 있다는 남편은, 아내에게 험한 뱃일을 시키는 게 미안하지만 표현 못 하는 천생 경상도 사나이다. 새벽 조업을 다녀온 부부는 몸도 녹일 겸, 배우 김영철에게 문어를 넣은 라면을 끓여 대접한다. 문어 라면 한 그릇에 담긴 정을 느끼며 바다 내음 흠씬 나는 포구 동네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숨겨진 구룡포의 아픈 역사를 품다
적산가옥 길과 암초 분식집 구룡포 포구 건너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본격적으로 포구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초입, 배우 김영철의 시선을 사로잡은 특이한 집을 한 채. 커다란 암초를 품고 있는 분식집이 눈에 띈다. 호기심에 분식집을 들어간 배우 김영철. 진짜 집 안 뒷면에 바위가 그대로 보인다. 주인장 말에 따르면 이 바위의 정체는 분식집 터가 바다였던 시절부터 있던 암초란다. 그 옛날, 구룡포 사람들은 왜 바닷가 코앞에 집을 짓고 살아야만 했을까...? 그 이면엔 일제 강점기를 지내온 우리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는데... 구룡포 동네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일제 강점기 동해 어업을 점령했던 침탈의 현장이 된 구룡포. 구룡포 마을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하나, 둘 보이는 것은 일본식 주택이 늘어선 적산가옥 거리다. 약 500m 남짓 적산가옥 거리를 지나면 보이는 구룡포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 계단을 오르며 돌기둥 뒷면을 살펴보니 시멘트로 덧발라진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계단의 맨 위 구룡포 공원 한가운데 역시 시멘트로 덧발라진 큰 비석이 눈에 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석들이 있는 걸까...? 이유는 구룡포항을 축항하는데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던 것을 해방 직후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로 덮은 것이라는데... 활기찬 포구 동네라고만 생각해온 구룡포에 숨겨진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며 배우 김영철은 깊은 탄식에 빠진다.
□ 골목길에서 만난 정겨운 얼굴들 [인생 문패]
구룡포 공원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한 집 건너 하나씩 재미난 풍경이 펼쳐진다. 집주인의 얼굴을 그려 넣은 문패다. “춘자네 사랑방, 독수리 오 자매 두목 옥분이네...!” 피식 웃음이 나는 집에서 나오는 주인장을 보니 얼굴이 문패와 쏙 빼닮았다. 50년 이상 이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포항시와 포항문화재단에서 [지금처럼 밝고 정겨운 미소를 간직하라며] 그려준 선물이라는데... 배우 김영철이 이 정겨운 풍경을 벗 삼아 골목을 걸어본다.
□ 제2의 고향 구룡포에서 달콤한 새 인생을 꾸리다
삼대 수제 강정집 구룡포엔 매일같이 옛날식 뻥튀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강정 가게 옆에 자리 잡은 뻥튀기 장수 때문이다. 방학마다 아버지 대신 뻥튀기 일을 한다는 대학생 뻥튀기 장수. 그의 단골은 바로 옆 3대째 운영 중인 강정 가게 주인장이다. 강정집엔 열 살 아이가 일하고 있다. 뻥튀기를 손님들 취향에 맞춰 물엿과 설탕에 버무리는 일은 1대 40년 경력의 할아버지의 몫, 자신과 나이가 같은 낡은 칼로 기가 막힌 솜씨를 보이며 강정을 자르는 건 40대 아버지의 몫, 마지막 포장은 열 살짜리 손주의 몫이다. 삶의 부침 때문에 구룡포로 내려왔다가 어느새 구룡포를 제2의 고향 삼고 살아간다는 할아버지와 3대의 이야기. 그 사연을 들어보며, 이젠 강정보다 더 달콤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3대의 소소한 행복을 배우 김영철이 직접 들어본다.
□ 바람까지 읽는 52년 경력의 국수 공장 할머니와 단골 멸치국수 가게의 이야기
해풍 수제 국수와 국수 가게 어딜 가나 바닷바람이 코끝 시원하게 불어오는 포항 구룡포. 그 안엔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국수 공장이 있다. 오래된 책상에 앉아 국수를 포장하는 할머니만큼이나 정겨운 가게로 배우 김영철이 들어간다. 이곳의 국수는 바닷바람과 햇살로만 말리는 이른바 ’해풍 국수‘. 52년 경력, 어느새 국수가 잘 마르는 바람까지 읽어내는 할머니의 손은 그간 고생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모두 그러했듯, 자식들 위해 자신의 몸이 닳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국수 가게 할머니의 지난 세월을 들으며 배우 김영철도 눈시울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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