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영화라는 매체에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즐거움을 주는 것 갑갑한 현실에 일탈을 제공하는 것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홍상수는 영화 <자유의 언덕>을 통해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것.'
<자유의 언덕>은 더도 덜도 아닌 딱 '홍상수 영화'입니다. 후줄근한 차림의 남자가 등장해 술 마시고 섹스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주인공이 일본인이라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의 차이라면 차이겠군요. 카세 료가 연기한, '모리'라는 사내가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오래 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권'을 찾아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권'과의 결혼을 원한다는군요. 물론 그의 마음을 그녀가 허락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사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합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냥 와야만 했습니다."
어째 우리 인생같지 않나요 바로 5분 후의 일도 모르지만, 우린 그냥 살아야만 하잖아요.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는 영화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 북촌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 그는 숙소 근처의 찻집에 들렀다가 그 찻집을 운영하는 여자 '영선'을 만나게 됩니다. 영선은 늘 책을 들고 다니고 어딘지 예술가적인 분위기를 내는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귀는 사람이 있음에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영선과 모리는 곧 영선이 운영하는 찻집 밖에서도 만나는 사이가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처음 술을 먹는 자리에서, 모리는 영선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대사를 건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간에 대한 인식 체계에 불과하다."
모리의 바로 저 대사를 전후해, 영화는 이야기의 '시간 순서'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관객은 잃어버렸던 개를 찾아준 모리에게 고마워하는 영선의 모습을 먼저 목격한 후, 길바닥에서 영선의 개를 발견하는 모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화 내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처럼 보였던 한국 남자 상원과의 첫 만남은 영화 거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볼 수 있지요.
여기에, 모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여인 '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극의 후반에 이르면, 영화는 '공간'의 개념마저 비틀어 버립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꿈일 수도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죠. 무려 오후 다섯시까지 늦잠을 자 버리는 모리의 모습, 영선이 키우는 개 이름이 '꿈'을 뜻하는 '꾸미'인 것. 그리고 영화의 모호한 결말이 이러한 해석─일장춘몽─을 뒷받침합니다.
관람이 아닌 체험
'일본인 남자가 좋아하는 한국인 여자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여러 한국인들을 만나 그들과 이런 저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지극히도 홍상수 다운 이 평범한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그 깊이와 공간감이 확장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인식하고, '실재와 가상'으로 공간을 구분짓는 것에 익숙하고 늘 그렇게 살아온 관객들은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세상을 읽는 전혀 다른 방법' '사물을 바라보는 전에 없던 시선'을 체험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이건 '관람'의 영화가 아닌 '체험'의 영화입니다. 이런 재미는 추석 '대목'을 노린 다른 영화들에게선 기대하기 어려운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스타 캐스팅의 화려한 영화도 좋지만, 올 추석엔 좀 색다른 경험을 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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