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로서, 평을 하기 전에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작품들이 종종 있습니다. 작품의 여운이 몹시 강해 그 감동을 오롯이 담아낼 문장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송희일 감독의 신작 <야간비행>이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덤덤하지만 강렬하고, 조용하지만 폭발적인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1등급' 용주, '일진' 기웅 그리고 '왕따' 기택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의 내용에 대해 먼저 말해 볼까요. 엄마랑 둘이 사는 용주는 모범생입니다. 선생님들이 '서울대 갈 놈'으로 따로 관리할 만큼 성적이 좋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기택을 돕기 위해 용기를 내는 등 성품도 훌륭한 녀석입니다. 그리고 그는, 동성애자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기웅은 용주와 반대되는 부분이 많은 아이입니다. 그는 학교 일진의 우두머리로, 기택을 괴롭히는 왕따 가해자 중 하나입니다. 대학교 진학은커녕 다니는 고등학교도 퇴학 직전입니다. 노조 투쟁 과정에서 도망자 신세가 돼버린 아버지 탓에 어머니와 단 둘이 가난하게 살고있죠.
극은 두 소년의 감정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풋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말의 맛, 그 미세한 흔들림과 달콤함이 영상으로 고스란히 구현됩니다. 자고있는 용주를 담 너머 몰래 바라보다 조용히 떠나는 기웅의 모습이나, 기웅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전거를 돌려달라며 그에게 계속 접근하는 용주의 모습 같은 것들은 정말 좋은 설정이죠. 두 소년의 섹스를 직접 묘사하지 않은 점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조용하고 섬세하게 흐르던 극은, 왕따인 기택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 용주와 일진 우두머리 기웅이 서로 우정 이상의 감정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다른 흐름을 맞습니다. 기택은 배신감에 기웅의 가정환경과 용주의 성 정체성을 교내 폭력 집단에게 폭로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서, 일진의 대표로서, 각각 양지와 음지에서 으뜸의 자리에 있던 용주와 기웅의 얼굴에는 낙인이 박힙니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낙인 말입니다.
아름다웠던 이야기는 이제 관객의 심장을 도리는 날선 칼이 되어, 소수자와 약자에 무자비한 한국사회의 야만을 가감 없이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 야만의 세계에서 피투성이가 되는 두 소년의 모습을 절절하게 담아내죠.
고통스런 두 소년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
대단히 고통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지난 8월 30일 오후 3시 여의도 CGV에서 진행된 감독 GV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생각한다더군요. 그의 말에 아주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엔딩'을 '해피'하게 받아들이기에는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용주와 기웅이 그간 겪은 일들과 앞으로 겪어야 할 그 모든 일들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기웅과 용주가 겪게 되는 지독히 '한국적인' 폭력들은 동성애자나 결손가정 자녀가 아니어도 이 나라 국민이면 대개는 공감할 일들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되는 등 해외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지만, 한국 관객들이 느꼈을 작품의 무게와 질감은 외국 관객들의 그것과는 좀 달랐을 겁니다.
영화의 울림과 공감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때문이기도 합니다. <야간비행>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학생 캐릭터 중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습니다. 주인공 용주는 비록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나 기택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기택은 그런 용주와 기웅의 몸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새겨버렸죠. 기웅은 비록 일진 우두머리이나, 중년의 나이를 먹고도 자신을 '해병대 출신'으로 소개하는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엄청난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송희일 감독은 이들 학생 모두를 연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먹먹해질 지경이죠. 기웅이 용주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장면은 이 작품의 아련한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장면입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더군요. 각본의 힘이자, 신인임을 믿기 어려운 곽시양·이재준 배우의 놀라운 연기력이 빛을 발한 장면입니다.
나쁜 어른들
영화에서 '순수하게 나쁜 놈'들은 '어른'뿐입니다.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고발에 "네가 친구 사귈 시간이 어딨냐"는 교사, 문제 학생 기웅을 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선생님, 동성애 학생을 노골적으로 혐오하고 조롱하는 선생님까지, 보고 있으면 이가 갈릴 지경입니다.
이송 감독은 "폭력적인 학교 환경을 만든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극중 선생들, 나아가 어른들의 모습은 이 나라 기성세대에 대한 고발이자 감독의 고해입니다. 정작 진짜로 고해를 해야 할 어른들은 지금도 일선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날선 칼을 휘두르고 있을 텐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늘 기억합시다. 이 사회, 이 세계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것을요. 우리 아이들에겐 '어른'이 필요하단 사실도요. 그리고 사랑이든 우정이든, 손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란 사실을요. 영화는 독립영화 상영관을 중심으로 지난 8월 28일 개봉해 순항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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