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정조를 암살하려는 이들, 그리고 암살 위협으로부터 그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정조 자신, 그리고 정조의 목숨을 노리거나 지키려는 이들 모두에겐 각자의 사연이 있고, 영화는 시간 순서로 이들의 이야기를 씨실과 날실을 꼬듯 교차해 나갑니다.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21세기 들어 나온 사극 영화 대부분이 그러하듯,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영화의 관심은, 아버지를 잔인하게 잃고 자신도 끊임없는 암살에 시달리는 정조의 내면,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정조를 지키려는 갑수의 내면, 월혜를 사랑하는 궐 밖 최고의 암살자 살수의 내면, 어린 동생을 지켜내려는 월혜의 내면에 있습니다.
기본적인 틀이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지만, 영화의 관심은 '인물의 내면'에 있고, 그렇다 보니 '사실 그 자체'는 자연스레 우선순위 밖의 것이 됩니다. 그 덕에 관객들은 월혜, 살수 같은 가상의 인물들이 왕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죠.
<역린>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이렇게 극에 자연스레 녹아든 실존과 가상의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의 갈등을 해소 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현빈이 연기한 왕 '정조'의 캐릭터가 그 일등공신입니다. 정조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죽이고 지키려는 자를 살리는 일 자체엔 관심이 없어요. 정조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판단의 기준은 '정의'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에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정의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요. 그래서 역적들을 용서하기도 하고, 자기 앞에 발을 내보이는 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기도 하고, 목숨걸고 자신을 지키려던 자의 본심을 알면서도 그를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조의 목숨을 두고 대립하는 다양한 인물들 사이엔 새로운 긴장이 생기고, 이야기엔 입체성이 부여됩니다. 의리와 배신이 마구 뒤얽히는 이 복잡한 이야기가 질서 있게 다가오는 것은, 폭풍 가운데서도 흔들림없이 '왕'의 역할을 지켜내는 정조의 캐릭터가 그 축을 잡아준 덕분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자신이 가진 이야기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했는가 하는 데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비장한 이야기를 흔들림없이 다루고 있으나,, '깊이'나 '힘'을 느끼기엔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궁 밖으로 쫓겨난 충신 갑수가 문 앞에서 왕에게 큰 절을 올리는 장면, 갑수와 을수의 재회 장면 모두 상황이 줄 수 있는 감동을 백 퍼센트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문제는 현대어의 사용입니다.<역린>의 인물들은 정조를 제외하곤 거의 현대어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합니다. 근래 제작된 사극 영화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극에 현대어를 쓰는 것은 현대어가 가진 특성이 사극의 이야기를더 풍부하게해줄 때만 유효합니다. <역린>의 '해요'체는 극을 풍부하게 하긴커녕 분위기만 훼손합니다. 인물들이 조선시대에 썼을리 만무한 욕을 내뱉는 장면에선,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그 비웃음 가까운 객석의 웃음은 각본가가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요.
현대어 사용이 가져온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등장인물들이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며 분위기를 깨는 동안, 극은 그 깊이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벼워져버린 이야기는 작품이 의도한 상징마저 해쳐요. 이를테면, 왕 정조와 충신 갑수의 이야기는 동성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 뒤주 비슷한 곳에 숨는 어린 정조의 모습은 정신분석학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죠. 그러나 지금의 완성본은 이야기를 그 지점까지 확장 시키기엔 너무 가볍습니다. '고작 말투'일 뿐인데, 극 자체를 뒤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영화 <역린>을 '볼 만한 영화'라 평합니다. 비록 가능성의 최대한을 발휘하는 덴 실패했으나, '일관성있는 지도자'를 보는 그 대리 만족감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더군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런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정조는 말합니다. '사소한 일도 정성을 다하면 귀하게 된다.' 지금 시대의 우리가, 정성을 다해 귀하게 만들어야 할 '사소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관성있게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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