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 보신 분들은 이거 꼭 좀 대답해주세요. 안 보신 분들도 의견을 주실 수 있도록 영화의 기본 설정과 결말 등을 함께 적습니다. 당연히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속 상황은 이래요. 달리는 KTX 안에 좀비 한 마리가 올라탔고, 이에 순식간에 기차 안이 좀비 '밭'이 됩니다. 난장판이 벌어지는 동안 생존자들은 세 칸에 나뉘게 돼요. 9번 칸, 13번 칸 화장실, 15번 칸 이렇게 말이죠. 9번 칸엔 공유랑 마동석이랑 야구부 청년(최우식) 이렇게 셋이 있고요. 13번 칸엔 공유의 딸이랑 마동석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15번 칸엔 야구부 청년과 사랑의 줄다리기 중인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를 비롯해 생존자들 대다수가 타고 있고요. (편의를 위해 배우들 본명으로 배역을 표기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좀비들은 시력을 이용해 먹잇감을 찾기 때문에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는 어두운 구간에서는 소리만 죽이면 힘을 못 씁니다. 또한, 9번, 13번 칸 화장실, 15번 칸, 기장실은 원활하게 교신이 가능한 상태고 요. 아울러 이 영화 속 좀비들은 문을 열 줄 모르기 때문에 좀비가 없는 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안전합니다. 즉, 9번 칸 사람들은 9번 칸에 계속 있으면 계속 안전하다는 얘깁니다.
자, 그럼 상식적으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어두운 터널 안에 차를 정차시켜 좀비들을 잠재운 후, 각자의 칸에서 교신하며 숨을 죽이고 구조를 기다려야 정상 아닙니까 영화 속 좀비랜드 한국은 아주 무정부 상태는 아니어서 외부와 교신이 닿을뿐더러 운행 중간중간 등장하는 터널의 규모도 생존자들이 탑승한 칸을 모두 어둠 안에 가릴 수 있는 규모입니다.
어이없게도 이들은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기차는 종점인 부산까지 움직이고, 남자들은 '설국열차'처럼 한 칸 한 칸 앞으로 움직여요. 부산만 가면 안전이 확실한 상황이면 부산행을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부산이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부산에 다 도착해서야 파악돼요. 기차가 <부산행>을 할 결정적 유인 요소가 따로 발견되질 않습니다. 부산 사는 공유의 아내는 연락 두절이고 ‘괜찮다’는 관제센터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이 대전역에서 확인되거든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주인공이라고 한 번만 깊게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 답이 다 나옵니다. 좀비 영화의 고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주인공들은 아주 명쾌한 이유로 '안전 장소'였던 쇼핑몰 문을 열고 좀비 떼를 향해 진격합니다. 하지만 수십 번 되감기 해봐도 <부산행>엔 제가 말한 '상식적인' 해결책. 즉, '어두운 터널에 차 세우고 서로 계속 교신하며 구조대기'가 불가능한, 다시 말해 기차가 움직여야 하고 남자 주인공들이 굳이 좀비와 액션을 벌여야만 하는 이유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상업 영화를 너무 따지면서 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작품의 질을 직접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애초에 액션을 벌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 좀비와 싸우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으면 공허합니다. 마동석의 근육과 공유의 날렵함이 이루는 조화로운 타격감은 있지만 거기까지예요. 감정을 이입하기 어렵습니다.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느낀 저 같은 관객들은 영화의 메타포(은유, 기호)도 공허하게 느꼈을 겁니다. 뭘 말하고 싶은지는 다 보입니다. 공유가 입에 책을 물려 좀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책을 읽어야 사람 된단 의미고, 시민을 공격하는 군부대는 광주민주화항쟁을 떠올리게 하죠. 어찌어찌 15번 칸에 도착한 주인공들을 맞이하는 건 '감염인일 수 있으니 나가라'는 냉대이고 이는 사회적 소수자를 상징하는 은유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에요. 메타포에서 쾌감을 느끼려면 이야기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산행> 속 상징들은 상징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실제로 부산행은 칸 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되는 등 비평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냈었죠. 그렇기에 더욱 소수 의견을 찾아 시그널을 보내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신 분, 어디 안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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