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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청·in 특별기고] 왜 그들이 소멸해야 하는가?

"청소년 공동체가 필요하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2.12 12:44 | 최종 수정 2020.02.26 21:56 의견 0

밝음과 어둠

어느 새 우리나라는 선진국 반열에 들고 있습니다. G20에 속한 경제 선진국이지만, 민주주의 지수를 따져볼 때 세계 20위 안에 들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선진화 되어 있습니다(참고로 미국, 일본의 지수 순위가 우리나라보다 뒤에 있습니다). 스포츠와 문야 분야에서도 강국이 되어습니다.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서 10위 권 안에 들고 있고, BTS 열풍과 이번 아카데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을 차지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성장 원동력은 교육에 대한 열정입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칭찬할 정도니까요. 대한민국이 빠른 속도로 세계를 선도하는 리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도 대한민국의 교육열을 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밝은 곳이 있으면 그늘이 있습니다.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한 대신 부익부 빈익빈 역시 빠른 속도로 벌어졌습니다. 민주주의 지수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투명성 부분(부패 측정)은 OECD 기준 최하위입니다. 세계 10위권 스포츠 강국 이면에는 스포츠계의 폭력, 성희롱, 혈연, 지연 비리가 셀 수도 없습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 어마어마한 사교육 비용의 수준을 보았을 땐 교육도 비효율적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삶의 만족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며, 자살률도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한동안 1위를 놓치지 않을 정도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자살을 바라보는 시선

과거부터 선생님들은 그 시절에는 흔하지 않은 자살 학생들의 자리를 보면서 “죽을 정신으로 살면 못할 거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선생님의 말씀은 진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을 경험하고 이겨냈으니 더 강한 정신력으로 살아갈 거 같다고요? ‘난 죽음을 극복했으니 더 잘 살 거야!’라고 다짐하면 뭐합니까? 개선되지 않은 현실에 다시 돌아오면, 굳은 다짐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죽지 못해 산다’든가, 다시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 반복됩니다.

과거보다 자살률이 높아진 원인은 참 다양합니다. 사회적 아노미 현상, 가정불화,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 성적비관 등 이유는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현대인이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각각의 개인적인 환경을 따져 봐도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상황은 자살하는 사람들만이 겪는 특수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일부의 사람들은 어려운 결정을 할까요? 

왜 죽어야 할까요? : 사랑의 부재

가족과 공동체 안의 사랑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고아들의 지능을 연구한 결과 생후 24개월 전에 입양돼 양부모의 보살핀 아래서 성장하면 보통 아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지능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지능이 80% 수준까지만 성장한다고 합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한 부모라도 생존해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청소년(사춘기)기에 사회적 일탈에 빠지는 경우가 현저히 낮다고 합니다. 

자살의 원인도 이와 비슷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은 당사자가 의지할 곳, 사랑해줄 존재-부모, 친구, 친척, 선생님 등의 부재와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족, 동아리, 학교, 신앙공동체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결심하기 전에 자신의 괴로운 마음이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가 있었다면, 그들과 함께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자살은 예방 가능합니다. 이는 예방이 가능한 병과 같습니다. 병은 치료할 수 있습니다. 병을 발견해서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은 환자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 병은 누구나 앓을 수 있는 병이어서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됩니다. 아픈 사람을 아프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성인이 아닙니다. 성인만큼 시비를 판단하기 힘든 과도기의 존재입니다. 필자도 과거 청소년 시절에 숱하게 방황했습니다. 가출도 해봤고, 삶을 비관해서 ‘죽어 볼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사랑, 신앙, 좋은 지인 등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현재의 나를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극단적인 결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외로움은 절망에 이르는 길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런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할 가능성이 큽니다.

치료하는 방법은 가족, 공동체, 후원자입니다. 불우한 환경, 보이지 않는 미래 등으로 많은 청소년이 스스로 소멸을 택합니다. 한 번의 어려운 사건을 극복하더라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 어려운 일을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 공동체

어느 곳을 가도 공동체를 강조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학교를 가도, 가까운 교회를 가도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학교는 입시 전쟁을 치르는 전쟁터고, 교회는 한 시간짜리 공동체입니다. 가족들 안에 있어도 소외감은 여전합니다. 가족모임은 어느새 서로의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개인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주인공은 청소년이라고 떠들어대지만, 1018세대를 위한 시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어린이 도서관’은 많지만, ‘청소년 도서관’은 거의 없습니다. 청소년들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 또한 청소년 자살이 높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인생의 과도기를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삶을 배울 시공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들을 돌봐주는 멘토들도 부족합니다. 어린이의 때는 부모의 돌봄 가운데 몇 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락함에서 벗어나 성장해야 하는 청소년들을 지지해주고 돌봐 줄 어른은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모이고 그들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나는 할 게 없어!’라고 비관하는 순간 청소년들은 삶을 빠르게 포기합니다. 혹은 “될 대로 돼라!”라고 생각하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여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청소년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애들 참 무섭다”등이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반응만 보입니다. 왜 그들이 그런 괴물이 됐는지의 논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봐 줄 시공간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스스로의 비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그들만을 위한 공동체가 마련돼야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이해해주고, 심지어 간식도 챙겨주는 그런 공동체 형성이 시급합니다. 어쩌면 새 공동체가 정착하기 위해 한 세대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첫걸음을 빨리 시작해야만 청소년 공동체의 정착 또한 빨라진다는 겁니다. 지금 기성세대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職務遺棄)가 아닐까요? 

[칼럼니스트 조연호 전문위원 / 아.청.in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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