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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3)]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페스트> - 알베르 카뮈 (1957년 수상자) ①편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3.19 11:05 | 최종 수정 2020.04.18 13:22 의견 0

카뮈 작품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3학년 때다.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카뮈 책들이 죽 꽂혀있는 책장을 목격했다. “카뮈”보다는 “까뮈”로 쓰여 있었는데, 사람 이름인 줄도 몰랐다. 당시,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주로 19세기 이전 작품들을 접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강의 시간에 카뮈를 간략히 소개받게 됐고, 그 계기로 그의 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전집의 시작은 <이방인>이었다. 소설 자체는 두껍지 않았지만, 표현은 깊었다.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페스트 중>

문장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페스트>를 먼저 말하자

1월 말부터 시작한 ‘코로나 19’. 3월 초까지 국내에서 맹렬히 확산되어 왔다. 초기에는 ‘코로나 19’라는 명칭이 아니라, ‘우한 폐렴’이라고 불렸고, 대구에서 확진자가 증가하자 국내에서는 ‘대구 폐렴’, ‘대구 코로나’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염병이고 인근 국가에서는 사망자까지 속출하는 상황이니, 당연히 대비하고 방역했어야 했는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사진출처: 예스24)

소설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쥐들, 그리고 며칠 후에 사망한 사람들. 분명 ‘페스트’ 조짐이었고, 분명한 증거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확진 선언은 더 많은 시민이 죽어 나가고 나서야 이뤄진다. 분명, 의료 전문가들은 소설 속에서도 ‘페스트’를 선언하나, 행정당국이 막고 있는 형편이었다. ‘팩트’가 ‘정치 논리’로 알려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제 도시는 봉쇄된다. ‘대구 봉쇄’라는 표현이 현실에 있었는데, 소설에서는 실제로 도시가 봉쇄된다. 모든 시민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고, 다른 지역 시민들도 도시로 들어 올 수 없다. 정부에서 혈청과 같은 치료제를 지원하지만, 한계가 명확해서 위기 타자의 도움만으로 페스트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염병과 싸워 이겨 나가야 할 주체는 도시 시민뿐이었다.

◇3가지 인간 부류 

위기의 상황에서 도시 시민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위기는 기회다!”라고 생각하면서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주로 밀매업자 등이다. 혹은 다 통제된 상황에서 자신만 도시에서 나가려고 애쓰는 사람들.

다음은 “모든 게 신의 뜻이다!”라고 생각하는 숙명론자들. 이런 상황은 모두 신의 뜻이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성직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스트 중>

이들은 부정적인 현실을 거부한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수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세 부류의 인간들은 모두 죽는다. 첫째 부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자 범법자가 되고, 숙명론자로 나오는 신부도 페스트로 사망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페스트에 저항했던 사람도 결국, 본인의 페스트는 이기지 못했다.

알베르 카뮈 (사진출처: 예스24)

작가는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각자의 페스트를 극복하기 힘들었다. 도시는 회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말로 ‘트라우마’가 남았을 것이다.

◇모순일까?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페스트 중>

간혹 ‘코로나 19’ 의심자 중 진료를 거부하면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보도된다. 확진자가 되면, 치료받을 수 있고, 격리돼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해결책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발버둥 치는 것일까? 그 답 역시 작가는 보여준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페스트 중>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코로나 19’ 확진보다 더 심각한 ‘전염병’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 의미는 상징적이다. 실제 병이 아니라, 그들의 현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현재 ‘신천지’는 이 모든 원흉의 제공자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리 그들이 부정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사회는 그들이 아무 대가 없이 내놓는 성금도 거부한다. ‘신천지’로 알려지기 싫은 사람은 진료를 거부한다. 낙인찍히는 게 더 싫은 것이다. 그들의 페스트는 ‘신천지 낙인’인 셈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진료가 필요했던 어르신이 대구 출신인 걸 숨겼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대구 시민과 함께한 사실을 은폐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들의 페스트는 ‘대구 낙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은 모순이 아니다. ‘낙인’을 피하려고 위장한 사람들은 부정을 긍정한 것이다. 그 부정을 긍정했기에 그들은 발버둥 친 것이다. 모순은 실제로 부정한 상황을 부정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페스트다. 그들 역시 자신 안에 있는 페스트를 극복하지 못하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의 페스트는 무엇인가?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음지에서 일한다. 알려지기를 꺼린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상황이 좋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상황이 좋아지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이들의 죽음, 사고 등은 일반 시민과 다를 바 없이 처리된다. 알려지지 않았기에 애석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들은 부정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주인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신중하다 못해 소심하다. 그들은 불완전성을 인정하기에 영웅이 되는 걸 싫어한다. 이런 보이지 않는 영웅들의 페스트는 ‘지나친 겸손’이다.

하나의 부류가 더 있다. 이들은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봉사도 열심히, 비판도 열심히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해결자가 되고자 한다. 이들의 페스트는 ‘자화자찬’이다. 스스로 고양하려 하기에 지지자들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의 안철수 씨가 지금처럼 봉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선행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의 노고는 인정되겠지만, ‘정치적 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발언은 항상 자화자찬 격이다.

◇정확한 진단이 우선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우선이다. ‘페스트’를 선언하지 않는 도시는 페스트를 해결할 수 없다. ‘코로나 19’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해결은 역시 불가능하다. 자신만의 ‘페스트’가 있다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쓰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진단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페스트’는 전염병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페스트’ 진단을 거부하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발버둥 칠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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