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여러분, 혹시 “왜 글을 써야 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그 답을 찾고자 애써 본 경험이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몇 가지 추려보면 우선, 청소년들은 글 쓸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사생대회가 전부인 현재 상황에서 글쓰기는 귀찮은 활동입니다. ‘잘 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대충 써야겠다’는 생각이 대부분입니다. 글을 능동적으로 써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 “왜 써야 하지?”라는 의문 자체를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글쓰기와 무관하게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로를 살펴보겠습니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때
자, 과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 갓난아이가 작고 귀여운 손에 펜을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앞에 놓아준 종이에 아무도 알 수 없는 형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거의 낙서 수준입니다. 그러고 나면, 갑자기 “우리 아기 최고!”라면서 주변 어른들이 환호성 지르고 손뼉을 쳐줍니다.
아기는 자신이 잘하는 줄 알고 더 열심히 펜을 휘두릅니다. 아기의 펜 놀림에 하얀 종이, 벽지, 장롱 등 멀쩡한 곳이 없습니다. 인생 처음으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걸 느끼는 순간입니다. 아기의 낙서는 글이 아닙니다. 흉내 내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펜으로 어떤 행위를 해도, 칭찬 듣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초등학교 시절로 가보겠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받아쓰기’를 했습니다(최근에는 공식적인 수업시간에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개 입학 전부터 한글을 떼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초등학생들이 받아쓰기 100점을 맞는 건 아닙니다.
제도권 교육기관에 들어가자 처음으로 글을 쓰는 활동에 평가가 메겨집니다. 과거에는 일정 수준 이상 점수를 얻지 못한 학생들이 ‘나머지 공부’를 했고(필자도 경험이 있습니다), 다시 시험 봐서 합격해야만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우열이 나뉘는 첫 번째 순간입니다.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최초 글쓰기의 목적은 100점을 맞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보상은 역시 칭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아기 때 받았던 일방적인 칭찬이 아닙니다. 이때부터 100점과 0점에 익숙해지고, 우열을 몸으로 체험합니다. 아기들에게는 무조건 칭찬으로 반응했던 어른들이은 점수를 보고 칭찬도 하고, 꾸중도 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다 하더라도 정확한 맞춤법을 사용할 수 있는 학생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학년 때부터 맞춤법에 연연하도록 교육받습니다. 이쯤이면 글쓰기가 아니라 맞춤법 테스트라고 할만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다 창의력을 위한 정말 중요한 기회를 날려 버립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학년은 계속 올라갑니다. 받아쓰기 시기부터 우열 구분에서 ‘열’로 판정받은 학생들은 글쓰기로 칭찬받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합니다. ‘글 쓰는 일은 나랑은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평생 “왜 글을 써야 하지?”라는 질문에서 멀어집니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받아쓰기에서 일정 수준에 도달한 학생들에게 새로운 과제가 생깁니다. 연중 한두 번 있는 ‘글짓기 대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대회 역시 평가를 위한 시공간이기 때문에 우열을 나눕니다. 입상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쯤에서 ‘글쓰기는 나랑 맞지 않나 봐!’라고 생각합니다.
‘글짓기 대회’ 말고도 나의 일상을 남기는 ‘일기’가 있는데, 나를 위한 글이 아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도록 만듭니다. 선생님이 검사했음을 알려주는 ‘검’이라는 도장이 일기장 면면에 찍히고, 이 또한 잘 쓴 학생은 시상을 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글쓰기로 독후감이 있습니다. 잘 쓴 독후감은 상을 줘서 격려하고 나머지는 숙제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갑니다. 다양한 글쓰기가 있었는데, 모두 평가해서 우열을 나눕니다. ‘우’에 속한 학생들은 계속 ‘칭찬’을 위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글쓰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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