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의 기존 집권 세력이었다. 동서독 기본조약을 둘러싸고 서독에서도 1972년 가을 냉전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보수 정치세력의 브란트 총리 불신임안 제출, 부결, 그리고 총선에서 사민당?자민당 연립 정부 세력 승리 등의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었듯이 동독 역시 공산주의 보수세력의 데탕트 거부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동독판 냉전 세력인 셈이다. 이들에게 동서공존이란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는 상황의 전개였다. 브란트 총리 집권 후의 신동방정책의 공세에 대하여 울브리히트 등은 재통일 주장을 반복하면서 국가연합 통일론을 되풀이하였다.
동서독 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울브리히트가 서독의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보낸 외교관계를 기본으로 한 기본관계 수립 요구 서한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의 공세였던 것이다. 모스크바 조약의 급진전 등 이후의 사태 진전은 이들의 예상을 앞서 나가면서 이들은 동서독 대화의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일종의 독자노선 경향까지 보였다.
소련이 작용하였는지 급기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정치국은 1971년 1월 21일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 앞으로 발터 울브리히트의 퇴진을 지원해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들은 경제와 대외정책에서의 그의 과오를 지적하면서 그의 사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 중반 이후 울브리히트는 동독의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정치국은 국내 문제와 복잡한 대외정책 문제가 당의 완전한 주의와 힘을 요구하고 있는 시점에서 당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력의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도 울브리히트는 정치국에게 초미의 과제 해결이라는 구체적 작업을 방해하는 토론 참여를 지속적으로 강요하여 왔다. 정치국은 1970년 9월 8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협약을 완전하고도 지속적으로 이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의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1970년 9월 8일 이미 근본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울브리히트는 정치국 외부의 많은 대중들 앞에서 이 결정을 반대하는 발언을 거듭하여 왔다. 제14차 중앙위원회(1970년 12월 9~11일)의 국내 발전과 이에 따른 목표 평가 승인 폐막사에서 울브리히트는 당의 노선과 다른 논조의 발언을 하여 정치국은 이의 공개를 막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울브리히트는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당의 정책에 관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간에 조율된 행동의 신뢰 있는 행보 및 독일연방공화국과의 합의 사항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이런 의견의 차이는 서방에도 알려졌다. 사실 그런 행동은 78세라는 인간적, 신체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자신의 무오류성에 몰입한 발터 울브리히트가 사회주의 우방공동체 내 다른 정당이 제시하지 못하는 미래의 10년에 대한 정치적으로 다른 예측들을 2000년까지 내놓겠다는 경향을 점점 더 드러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울브리히트가 자신을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과 동렬에 서고 싶어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고 여러 분야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을 자신의 최대 과업으로 보고 있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직과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분리하고 울브리히트의 역할을 국가평의회 의장직으로 제한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는 의견에 도달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국가평의회의 인위적으로 확대된 권위를 제한하여 정치국 통제 하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공식적인 의료 의견은 울브리히트가 하루에 4시간만 업무를 보고 수, 토, 일요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시급하고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에 최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브레즈네프가 수일 내에 울브리히트와 대화를 가져서 그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에 본인의 사임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서신에는 호네커를 비롯한 정치국원들의 연명 서명이 첨부되었다.
결국 이 편지의 결론은, 신 동방정책과 관련하여 모스크바조약의 합의 사항 이행이나 동서독 협상 진전에 울브라이트가 장애물이 되고 있으니 그의 사임에 협력해주고 그를 국가평의회 의장직으로 국한시키고 그 권한도 축소할 뿐만 아니라 정치국 산하에 두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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