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54)] 4강국을 향한 요청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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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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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브란트 총리는 전임 총리의 정책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에 무력 사용이나 이의 위협을 포기하는 구속력 있는 협정을 체결할 의지가 있음을 선언하고, 4강국의 특별한 책임 하에 있는 베를린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가 소련과 협의를 계속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베를린의 특별한 지위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4강국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신 정부는 무력의 사용이나 사용 위협을 상호 포기하는 구속력 있는 협정 체결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이는 독일민주공화국에도 해당된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와는 과거를 넘어서 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력포기 정책에는 각국의 영토권 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예민한 영토 문제에서 현상을 유지하겠다.
그러면서 브란트 총리는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서독의 안보를 나토의 틀 내에서 그리고 미국과의 유대 속에서 추구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나토의 결속은 유럽에서 긴장완화의 전제조건이며, 신 정부가 고려하고 있는 두 방향의 안보정책은 동시에 그리고 대등한 군비축소와 군비통제의 지속적 노력이나 충분한 독일연방공화국 안전보장이다. 서독은 균형과 평화유지가 안보정책이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정부 출범 후 불과 2달 만인 1970년 1월에 브란트 정부는 새로운 동방정책 실천에 나섰다. 서독과 소련, 동독,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협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과 소련 간의 전략무기통제협정 추진, 4강국의 서베를린 협상 등과 함께 전체적인 유럽의 데탕트 구조 속에서 한 패키지로 추진되었다.
우선 새로운 동방정책에서 체결되는 모든 조약의 서론이 되는 소련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소련과 대화의 첫 성과는 1970년 1월 소련과 서독 업계 간의 가스공급협정이었다. 1970년 1월 에곤 바르가 소련 상대와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2월에 서방 3강국이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4자 회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발표되었다. 1970년 3월 7일 브란트 총리가 분단 후 처음으로 동독 지역인 에어푸르트를 방문하여 동독의 슈토프 각료회의 의장과 회담을 가지는 신동방정책의 상징이 되는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1970년 5월 바르는 그로미코(Andrei Andreyevich Gromyko)와의 그 동안의 회담을 통하여 서독과 소련간 조약(모스크바조약) 초안을 마련하였다. 7월 들어서 서독의 셸 외무장관과 소련의 그로미코 외무장관 간에 마지막 협상이 있었다. 역시 쌍방 간에 이견이 있었다. 서독은 독일 통일 문제, 서베를린 통행 자유 보장에 대한 소련의 확답을 받으려고 하였고,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의 현 국경선인 오데르-나이쎄 선을 포함한 동유럽국경선 인정과 서독의 동독 승인을 서독으로부터 확답 받고자 했다. 대체로 이 점은 타결을 보게 된다.
그리고 8월 6일 서독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일 통일에 관한 서한’을 보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이 조약이 독일 국민이 자유로운 자결권에 따라 통일을 다시 달성하여 유럽의 평화를 달성하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목표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서한은 조약에 첨부되었다. 말하자면 서독은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통일 정책을 계속 추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서한이 조약 부속문으로 첨부되었다는 것은 국내에서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통일 목표를 포기했다는 비난 방패용으로 활용된다. 이 서한을 소련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목적의 서한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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