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일 통일(68)] 어려워진 동독의 경제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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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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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당시 경제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던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1978년 15억 루블 차관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수년간 계속된 흉작과 1979년 12월 27일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군사비 지출로 인하여 소련 경제 자체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더 이상의 동독 지원은 어렵게 되었다.
당시 소련은 동독은 지원하면서도 사정이 비슷한 루마니아와 폴란드는 지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서방에 대하여 디폴트 선언까지 검토하였다. 이런 사정에서 1981년 폴란드의 연대운동에 따른 계엄령 선포 시에 소련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할 수 없었다.
소련은 또한 외화 획득을 위하여 동부 유럽 동맹국에 대하여 코메콘 가격 기준 석유 공급을 줄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유럽 국가의 민주화, 동독의 붕괴와 독일 통일은 이에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는 소련 경제의 붕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이에 동독은 서독으로부터 1983년, 1984년 각기 10억 마르크, 9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받아들이고 해외차입에 대하여 서독으로부터 지급보증까지 받았다. 동독 통일사회당 서기장 호네커와 서독의 콜 수상은 이를 손해관리정책(Schadenbegrenzung), 이성연합(Koalition der Vernunft), 책임공동체(Verantwortungsgemeinschaft)라 불렀다.
당시 동독은 국제사회에서 신용 하락으로 차관을 도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서독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동독은 국경에 설치한 자동발사 장치를 제거하여 국경 통제 방침을 변경하고,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 신청에 ‘신속한’ 허가 절차를 도입하였다.
1984년 8월 25일 콜 정부의 예닝거(Phillip Jenninger) 정무장관은 ’10억 마르크 차관과 인도주의적 양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독 정부는 기본 원칙과 법적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새로운 사고와 유연한 자세로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책임공동체(Verantwortungsgemeinschaft)와 이성연합(Koalition der Vernunft) 개념은 군축에만 한정될 수는 없고 사람들을 더욱 안심시키는 것도 포함되며, 그래서 분단된 독일인들의 부담 완화는 매우 극히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이다.
차관 제공은 일반적인 사업상의 거래가 아닌 다른 철학을 가진 것으로, 동서독 관계의 활성화를 언급하면서, 이미 많은 긍정적인 반응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동독 측의 여행 완화 조치를 들면서 동독과 모든 문제와 관한 대화를 포함하여 현 노선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기본조약 제7조 3호에 대한 추가 의정서 합의에 따라 서독은 동서독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철도 건설과 보수에 나섰다. 베를린 왕복 철도와 도로 등 교통로 확장과 개선은 1974년에 동독이 먼저 제안하였고, 코메콘(COMMECON) 회원국 역시 동유럽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교통망 확충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동독은 이 도로의 건설비를 서독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을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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