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일 통일(67)]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동서독 교류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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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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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독일정책 및 동방정책 논의에서는 슈미트 총리의 사임으로 사민당-자민당 연립정부가 1982년에 헬무트 콜 총리 시기인, 기민련/기사연-자민당 연립정부 이후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년 12월 27일), 폴란드 계엄령 선포(1981년 12월 13일)와 소련의 중거리미사일(SS-20)에 대응한 1979년 12월 12일 나토의 이중궤도 결의와 이후 이의 실현을 둘러싼 특히 서독 국외의 격렬한 논쟁과 평화운동 등으로 제2의 냉전 논의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권이 교체되었고, 기민련/기사연과 사민당의 강령 상 당론은 분명히 차이가 나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콜 정부가 전 정부가 체결한 동방정책의 조약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1972년 모스크바조약 등 동방정책 상 모든 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 발효 후를 ‘사실상’ 양국체제라 보고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기술한다.
국가 수립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서독이 1973년의 1차 오일쇼크 등 세계경제 흐름의 변화로 경제불황과 저성장 기조의 정착, 실업의 급증 등 경제 문제에다 동독 슈타지의 간첩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조약을 비롯한 신동방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에 근거한,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및 동독과의 관계는 1982년 사임 시까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 의해 그 궤도가 정착되었다. 그의 사임과 사민당의 총선 패배는 결국 1980년대의 유럽을 겨냥한 소련의 중거리 핵 미사일 배치와 이에 대응한 미국의 퍼싱 Ⅱ 등 중거리 핵 미사일의 서독 내 미군기지에 배치를 허용한 이중 궤도 결정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국내의 반핵 평화주의 운동과 당내의 노선갈등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중거리 핵 미사일 서독 배치 찬성 등 당시 국제적 신냉전 분위기의 흐름을 같이하면서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한 기민련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정부도 기민련의 동방정책 원칙은 바꾸지 않았지만 사민당-자민당 연립 전 정부의 동방정책과 독일정책 기조는 유지하였다. 이런 기조 속에 콜 정부는 동유럽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동독 민주화운동 고조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 통일을 성취하였다.
1982년 당시 새로 출범한 콜 정부가 전 정부 즉 슈미트 총리의 사민당-자민당 정부의 독일정책 및 동방정책을 유지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연방의회 36회기 기민련의 첫 제안 문서에서, 독일통일과 자결의 목표는 반복적으로 강조되었지만, ‘재통일’이란 개념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에 의해 기민련이 현재 통일 문제를 동서독 관계의 현실정치적 ‘불가피성’의 하위에 두고 있다는 근거 없는 추측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당대회의 결의에서 논의 없이 완전히 자명하게 ‘재통일’ 개념은 독일정책 장(章) 머리에 놓였고 이에 의해 기민련의 독일정책의 최상 목표로 재강조되었다.
동서독은 기본조약 체결과 함께 기본조약상 합의에 따라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뒷받침할 각종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분단시대의 동서교역을 비롯한 각종 교류는 제도적 기초 위에서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진영 간의 긴장과 이에 따른 동서독 간의 긴장에 따라 단속적으로 제한되던 동서독 간의 왕래 등 인적 교류는 일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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