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 중심의 피지컬 연극과 새로운 무대언어를 창조하는 극단 <초인>이 셰익스피어 원작 <베니스의 상인>으로 돌아왔다.
2003년 창단 후 <기차>, <우리 엄마는 선녀였다>, <특급호텔>, <게르니까>, <기찻길>, <스프레이>, <99%>, <원맨쇼 맥베스> 등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세계적인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비롯한 세계 10여 개국 초청공연을 통해 대한민국 공연문화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번 <베니스의 상인>은 작품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새롭지만, 극단 <초인>의 오랜 멤버로 활동하면서 영화 <련희와 연희>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진 이상희 배우가 협력연출로 참여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선보인다.
기존의 텍스트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포샤와 밧사니오’, ‘네릿사와 그라시아노’ 두 커플이 악당 샤일록을 응징하고 사랑에 성공하는 권선징악의 로맨틱 코미디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박정의 연출은 “집단지성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 광기에 대한 연구”라는 표현으로 400년 전 이야기 속에서 두드러지는 정체성의 문제를 발견하며 <베니스의 상인> 속에 숨어 있는 비극을 끌어낸다.
이를 위해 폭이 좁은 열두 개의 벤치를 오브제로 활용해 배우들의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며, 배우들은 가면으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가리기도 하고 정체성을 찾지 못해 부유하는 자신을 가면으로 가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시놉시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온 베니스의 거상 안토니오는 은밀히 사랑하던 밧사니오가 곧 자신을 떠날 거라는 우울감에 시달린다. 그때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벨몬트 최고의 부자 포오샤가 남편감을 고른다는 소식이 베니스에 전해진다. 인생 한 방을 노리던 밧사니오는 청혼자금 삼천 다카트를 빌리기 위해 다시 안토니오를 찾는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현금은 네 척의 무역선에 모두 투자된 상태, 베니스에서 삼천 다카트라는 거액을 당장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유태인 샤일록뿐. 늘상 유태인을 박해하고 모욕주던 안토니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샤일록은 삼개월의 기한을 어길 경우,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원하는 부위에서 베어내겠다는 조건으로 삼천 다카트를 빌려준다.
밧사니오가 벨몬트로 떠나던 날, 밧사니오의 마지막 만찬에 초대받아 샤일록이 집을 비운 사이, 샤일록의 딸 제시카가 아버지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딸의 도주가 안토니오와 밧사니오의 계략이라 생각한 샤일록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삼개월 뒤 밧사니오는 청혼에 성공하지만, 무역선 네 척이 모두 파선한 안토니오는 돈을 갚을 수 없게 된다.
샤일록은 밧사니오가 제안하는 열 배, 스무 배의 위약금을 모두 마다하고 차용증에 적힌 대로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베어내겠다고 선언하는데...
(극단 <초인> 제공)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 박정의 연출]
민주주의의 장점이 집단 이성의 힘이라면 단점은 집단 광기일 것이다. 오래된 고전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이는 집단 광기, ‘한 인간을 경제적으로 몰락시키고 그의 정신세계마저 강제로 부정’하게 만드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개인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의 정체성이 스스로에게도 명확하게 느껴지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고 인식될 때 안정된 삶, 보람있는 삶을 살 확률은 높아지는 것 같다.
이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은 질문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정의 내리지 못할 때, 타인의 정의, 또는 국적, 직업,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 누구의 아들, 딸, 누구의 남편, 부인과 같은 객관적 정의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서울시민, 성북구민, 연극인, 극단초인 등 집단의 정체성은 타 집단에 대해 배타적 정체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정체성을 찾지 못한 개인의 삶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불안정한 삶은 이유 없는 분노를 축적하게 만들고 집단의 정체성에 자신을 포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축적된 분노가 모여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을 표출함으로서 자기 집단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진다고 느끼는 것 같다.
<베니스의 상인>, 집단 지성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 광기에 관한 연구. 400년 전 이야기,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아도 우리의 삶이 인간의 정신작용의 범주 안에 있으니 언제나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간들의 분노, 그 방황하던 분노가 공격목표를 발견했을 때 이성이라는 제동장치는 얼마나 작동될 수 있을까? 삶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정체성. 대립이 아닌 보완이 되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연극, 사람 사는 이야기 – 이상희 협력연출]
유태인 샤일록, 그의 힘은 돈에서, 그의 열정은 복수심에서 나온다. 개처럼 벌어 이국땅 베니스에 뿌리를 내린 혁명가. 그러나 모든 혁명 1세대는 2세대에 의해 숙청된다고 했던가. 혁명가의 딸, 제시카는 아버지를 제거함으로써 폭력의 땅에 공존의 뿌리를 내린다.
포오샤가 밧사니오를 구원하고, 제시카가 로렌조를 구원하고, 네릿사가 그래시아노를 구원하고. 구원의 동아줄을 잡은 부유물들은 진보의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한 세대 전 베니스를 무역과 금융의 도시로 이끌었던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세상은 이제 저문다.
독실한 기독교도이자 부유한 토착민. 기득권자 안토니오. 그는 성소수자라는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가면 뒤에 숨기고 있다.
최상위 기득권자인 포오샤는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설계할 수 없다. 그녀는 지금 아버지가 남긴 유언에 갇혀있다. 그래서 그녀의 주체성에는 술책과 위장이 필요하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상속자가 된 것처럼.
가난한 토착민 밧사니오, 그래시아노, 로렌조. 노동의 가치는 한없이 떨어지고 싸구려 일자리마저 이주민들에게 빼앗긴 베니스의 부유물들. 그들의 선택은, 술과 사랑으로 도피하거나 도박과 로또를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이 되거나.
그리고 네릿사.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아버지 아가멤논이 제물로 바친 딸 이피게니아가 떠오른다. 자비의 구원을 받아 신의 사제가 된 이피게니아. 우리는 그녀의 안타까운 시선을 통해 타들어 간 수많은 불나방들을 본다.